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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14. 2020

억울한 것도 인생이다

그  문제를 푼 건 나란 말이에요


퇴근해 돌아오니 아들놈이 안방 침대에서 끙끙 앓고 있다.

이야기 좀 해요. 불은 꺼주시고요.

아들 녀석은 어렸을 때부터 고민이 생기면 안방 침대에 누웠다.

아마 엄마 아빠의 체취가 묻은 침대에서 평온을 얻는 듯하다.

무슨 일 있니?

고1 때였다.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이 모인 학교인데 서로 충만한 자부심으로 경쟁이 치열했고 숫기가 없던 아들놈은 모르긴 해도 있는 듯 없는 듯  실바람 타며 공기처럼 섞여 있었을 것이다. 사춘기 녀석들이니 그 수줍은 듯 패기 넘치는 치기로 얼마나 시선을 끌고 싶었을까.. 알게 모르게 기회를 엿봤을 것이다.  

어느 날 기회가 왔다.
수학 시간에 선생님이 다소 난해한 문제를 내놓았고 다들 낑낑대며 못 풀었다.  아들놈은 그 문제를 풀었다. 초등학생 때 다니던 공부방에서 중학생 형들이 못 푸는 문제를 아무 생각 없이 풀었다가 시커먼 형들의 추앙(?)을 받고 우쭐했던 경험이 되살아났다. 아들은 그 짜릿한 순간을 기대했다.

각기 자기 자리에 앉아 푸는 거였는데 선생님이 일일이 다니며 틀렸네 또 틀렸네 점검하며 훑어오다가  드디어 아들놈 자리에 와서 노트를 들여다보며

오~ 너는 풀었구나. 처음으로 답을 맞힌 친구가 나왔네?

장마철 습기처럼 가라앉아있던 아들의 존재감이 분수처럼 뿜어져 오르는 순간이었다. 아들은 희열을 느꼈고 드디어 학기 초라 탐색전에 몰입돼있던 반 친구들 사이에서 본인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푼 유일한 녀석으로, 당장 친하고 싶은 똑똑한 친구로  선망의 대상이 되리라는 기대에 설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세상은 항상 상상했던 대로만 흘러가지는 않는다는 사실.

휴식시간에 반 아이들이 책상 주위로 우르르 몰려들 거라는 생각은 착각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나누는 이야기는 예상을 빗나갔다.

아까 수학 문제 푼 애 가 강길석이지?
걔는 못하는 게 없네 부러워

맞아 강길석 같아. 는 풀 줄 알았어.

아뿔싸.
강길석은 아들놈 바로 뒷자리에 앉은 친구였다 적극적이고 사교성, 쇼맨쉽도 빛나서 발표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단연 돋보였다.

아이들은 어려운 문제에 매달려서 끙끙대며 선생님이 자기 자리로 오기 전까지 각자 자신 없는 모습으로 고개를 처박고 문제풀이에 몰입해 있던 터였다.  선생님이 좌측 앞자리부터 하나씩 점검해오며 틀렸네.. 이게 아니야. 너도 틀렸어 라고 지적하는  소리 대중만으로 위치를 어림짐작 하던 순간이라, 정작 유일하게 문제를 풀어냈다는 그 수학천재가 정확히 누구인지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오~  너는 풀었구나!

라는 감탄사를 듣고 고개를 들었을 때는 이미 선생님이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고 그 위치는 대강 모든 것에 독보적이던 강길석의 책상쯤이었다.

아이들은 부러움 반 시기심 반으로 경쟁자인 강길석에게  문제를 맞힌 게 너였니?라고 물어 확인하지 않았다. 다만 빠르게 강길석으로 퍼지고 있었다. 차라리 확인해주면 좋았을 것을....

아들은 벙어리 냉가슴을 앓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몸소 체험했다. 아니 아비를 아비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답답함도 느꼈을 것이다.

선생님의 칭찬을 듣는 순간 온몸에 전율처럼 흐르던 자만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하루하루 억울함과 이유모를 피해의식에 시달렸다. 드디어 병이 나서 엄마의 침대에 불을 끄고 누웠다.

그 문제를 푼 건 난데 아무도 그걸 몰라요.
내입으로 말할 수도 없어요.

아들한테는 나름 역사적인 순간이었는데 아이들한테는 빠르게 지나간 해프닝일 뿐이었다. 아들은 충분히 과시하지도 못한 채 잊혀져가는 그날의 '기회'가  용납이 안되었다.

억울한 것도 인생이란다

아들도 17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감정들을 맛보고 또 그와 유사한 감정들을 상대방에게 느끼게 했을 것이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안겨주었던 감정은 의식하지 않은 채 넘어왔고, 나에게 남은 수많은 감정들 중 어떤 건  생기는 순간 사라지고 또 어떤 감정은 며칠을 일상과 함께 품고 있다가  배설했을 것이다..

끝까지 남아있는 감정은 흔하지 않다. 천년만년 살아 숨 쉴 것 같은 '사랑'이라는 감정도 실은 변덕을 죽 끓듯이 하다 물거품처럼 공중분해되기도 하지 않은가...

또한 혜민스님의 어느 시처럼, 사람들은 생각만큼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그 어려운 수학 잘 푼 놈이 강길석이라고 생각했든 그 앞에 앉은 이름 모를 녀석이라고  생각했든 그날 그 순간의 부러움과 감탄은 10분 20분이 되기 전부터 슬슬  희석되기 시작해서 1시간 2시간 하루 이틀 지나면 벌써 누구 머리에도 남아있지 않을 수 있다. 오로지 아쉽고 억울한 아들놈 머리에만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나 칭찬의 마음은 돈 주고 구입한 향수병을 몇 번 칙칙 뿌리듯이  그렇게 공기와 옷감 사이사이로 흩어지고, 새로운 느낌  새로운 감정들이 비슷한 순서대로  끊임없이 왔다가 역시 사라진다.

그 숱하게 반복되는 상황 속에서 어디선가 아들처럼 끙끙 앓고 있는 이가 있을 것이다.

" 아이들은 강길석이가 수학 문제를 푼 걸로 착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수학 문제를 푼 것은 너잖아.

그런 상황이면 너보다는 강길석이가 더 부담스러울 것 같은데?"

아들은 어둠 속에서 미동도 없다.

" 만약 네가 수학 문제를 못 풀었는데 잘 푼 것처럼 오해받아 순간에 인기가 더해진 강길석이었다면 더 좋겠니?"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엄마."

" 다른 아이들은 몰랐더라도
바로 뒷자리에 앉았던 강길석은 그 수학 문제를 푼 녀석이 너라는 걸 알잖아."

진실은 어긋나는 순간이 있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자리를 찾고 고개를 든다.

그러니까 '진실'이다.

"그리고 실은 이런 건 진실이 묻혔다고도 할 수가 없어. 수학 문제를 푸는 건 실력이고 부단한 노력의 결과잖아. 처음엔 잘하는 줄 소문났다가  시간이 지나서 그렇게 잘하는 게 아닌 걸로 재인식되는 것보다는,  말없는 실력자였던 것이 더 낫지 않겠니?  엄청 멋있을 것 같은데~~"

아들은 조금씩 부스럭댔다.

인생은 참 그렇다. 누군가가 알아주고 못 알아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너무 중요하다.  나 자신의 내면보다  다른 누군가의 눈이 또 그렇게 중요하다.

그러다 보니 살면서 내내 억울함과 동행한다.
억울함이란 감정은 누군가가 못 알아줘서, 혹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해서, 혹은 인정받지 못해서, 혹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해서 생겨나는 감정의 총칭이다. 그러니 억울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긍정적이다.  더 나은 조건을 내가 원하고 있다는 것이니까.. 더 나은 상태를 원할만큼 내가 어느 정도는 충분하다는  것이니까..

" 내가 너라면, 반 친구들이 못 푸는 문제를 혼자만 풀어냈다는 자부심을 비밀처럼 간직하는 것도 흥분될 것 같다."

아들은 일어났다. 불을 켰다.

그리고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자기 방으로 갔다.

아들 방에 불이 켜지고 책상에 앉아 책을 펴는 소리가 들렸다.

억울한 것도 인생이다.
그 억울함을 빨리 털고 일어나는 속도가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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