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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22. 2020

민트 10장, 그레이 10장, 진회색 10장

택배 박스의  비밀

토요일 저녁에 퇴근하니
딸과 아들이 거실에 앉아 뭔가를 노려보고 있었다.

거실 가운데에 놓인 택배 박스.


저게 뭐니?

아들 : 아빠가 옷 사셨나 봐요.

옷?  안 풀어봤어? 함 풀어보지?

딸 : 아빠 거라서 안 뜯었어요
  민트 10장, 그레이 10장,  진회색 10장이라고 쓰여 있어요.


아들 : 아 진짜 우리 아빠 대단하세요~
           같은 색 옷을 10장씩 주문하시다니..

평소 말수가 적은 아들 녀석은
근검절약하는 아빠의 성격에 딱 맞다고,
어떻게 같은 옷을 색깔별로 10장씩 살 생각을 하셨는지 모르겠다고~~  
자기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게  못  입고 다닌다고,  
옷 하나 고르는데도 몇 시간씩 걸리는데,
우리 아빤 정말 대단하고 특이하신 분이라고..

자긴 왜 아빠를 안 닮았는지 모르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딸 역시도, 진짜 아빠다워~  화려한 옷을 싫어하시는 성격인 건 알겠는데 옷 고르는 게 귀찮다고 그냥 맨날 같은 옷을 돌려 입을 생각을 하시다니.
우리 아빠는 진짜 남자야!  남자의 정석이야.

감탄사를 연발하며 열띤 수다를 늘어놓았다.

아이들에게는 택배박스에 붙은 전표의 아빠 이름과 민트 10장,  그레이 10장,  진회색 10장이 특별한 사건인 듯싶었다.

오래 전에 읽은 인터뷰 기사가 생각났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였던 걸로 기억나는데,  거의 모든 옷을 진회색으로  여러 개 사서 입는다고 했다.
아침마다 오늘은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색깔로 맞춤할까~ 하는 고민을 안 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일상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큰데,  하다못해 옷을 고르고 선택하는 스트레스에서라도 벗어나고 싶었다고 했다.

하긴 티셔츠건 블라우스건 한가지를 선택하면 그 옷에 맞추어 속옷, 헤어, 하의, 신발까지 다 다시 선택의 대상이 된다.  따지고 보면 평범하고 반복되는 일상에서도 우린 끊임없이 뭔가를 선택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쌓여가는 스트레스가 어디 한 두가지이겠는가

그 사람의 인터뷰가 수년이 흐른 지금도 가끔씩 생각나는 거 보면  알게 모르게 공감하는 바가 컸던 모양이다.  


매번 더 예쁘고 돋보이는 패션을 위해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치는 내 모습에 정신적 물질적 에너지를 쏟으며 사는 나 자신이 조금 열적기도 했다.  그렇게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한번도 스스로 의문을 제기해보지 않았으니 나도  단순한 부류에 속하긴 한다.


생각난김에 아이들에게  인터뷰 기사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아이들은 솔깃해하며

'아빠같은 사람인가보다~.'  ' 난  예쁘고 어울리는 옷을 사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 해소법인데~' 라며 다시 수다를 풀어냈다.


택배박스 하나에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는 아이들을 뒤로 하고  안방으로 들어가다가 문득... 멈춰섰다.


'??  평소에 자기 손으로 양말 한 켤레 안 사는 사람이 옷을 30벌씩 주문해?  '


다시 거실로 나와서

아~~  아빠 단체티 주문하셨는가 보다
동기들이랑 여행 가신댔잖아..

근데.. 대여섯 명 가는데 무슨 티까지 맞춰 입냐? 너네 아빠 그런 거 딱 질색이어서  신혼 때도 커플티를 못 입어봤는데 나원참..

그러자 아이들의 수다가 이어졌다.


어른 아저씨들은 참 이상타~  여행을 간다고 꼭 같은 그레이 옷을 입고 돌아다녀야 하나?  민트는 또 뭐야? 그런 건 유치원 때로 끝내야 하는 거 아냐?.. 하긴 등산 가는 아줌마들은 거의 보라색 계통의 등산복을 입고 어딘가에 꽃무늬가 꼭 있어 등등

어른들의 패션과 사고에 대해 평소 참 생각이 많았나보다.  장단을 맞춰가며 늘어놓는 이야기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포장도 풀지 않은 택배박스가 평상시에는  엿볼 수 없었던 아이들의 의식세계를  쓸어담았다.
마침 지방 갔다 올라온 남편이 도착했다.

아들: 아빠~  주문하신 단체티가 왔어요.  여행 갈 때 입으실..


아빠: 단체티? 여행? 뭔 소리야?

하더니 박스를 개봉했다.

민트 10장, 그레이 10장,  진회색 10장씩 묶음인데
옷이 아니라....


수건 주문했냐?


아.. 수건!


며칠 전에  낡아진  수건들을 모두 버리고 새로 주문했었다..정신머리 하곤... 근데 그게 왜 남편 이름으로 왔지? 아..그 인터넷 쇼핑몰에 사무실 배달용은 내이름으로,  집주소는 남편이름으로  저장해두었던 모양이다.



실상 내용은 알지 못하고 겉포장만 보고 판단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택배 포장에 붙은 전표만을 보고
아들은  평소 아빠에 대해 가진 생각으로 자기와 아빠의 다른 점을 이야기하고,

딸은 딸대로 남성관에 대한 기준을 나열하고,
나는 오래전에 본 인터뷰 기사까지 소환해내다가  여행에 무슨 단체티까지 맞췄나 안 하던 짓을 하네~의문을 가졌다.

진실은 포장된 박스 안에 요동도 없이 있는데,
각기 다른 추론과 상상들이 박스를

감아돌았다.

30장의 수건을 담은 택배박스가  또 가르침을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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