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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24. 2020

베트남 색시가 한국에서 집을 사다

마이!  언제든 밥 먹으러 와라~

늦추위가 성화를 부리던 어느해 밤.
퇴근하려고 문단속을 하는데,  초등학교 고학년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50대 후반 남성이 들어왔다.
아침 일찍 전화를 하여 보증금 500만 원짜리 월셋집이 있느냐고 묻더니 늦은 시간에 방문한 것이다.  

다행히 맘에 들어했고 조건이 맞아서 계약을 하기로 했다.  


임대인이 오길 기다리는 그 찬 겨울밤,  나는 남자분 옆에 앉은 여자아이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유난히 새까만 긴 생머리를 하나로 묶고 초등학생 여자아이들이  잘 입는 레이스 달린 핑크색  패딩점퍼를 입었는데...  까무잡잡한 피부,,, 늦둥이 딸인가?   왜 밤중에 어린애가 집에 안 있고 예까지 따라왔을까.. 밥이나 먹여서 데리고 다니는가.... 기어이  입이 열렸다.

얘~  밥은 먹었니?

질문이  갑작스러웠나....  여자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옆에 앉은  남자가  말했다.

 제 집사람이에요..

마이... 당시 23세 베트남 국적.   키 140cm가 될까 말까...  남성은 한국인 61세.
그들에게는 3개월 된 남자아이가 있었다.



3년이 지난  어느 날. 마이의 남편이  다시 사무실을 방문했다.  집을 사고 싶다고 했다.
아파트를 몇 개  보고 그중 하나를 골라 계약을 하기로 했다..

계약서를 쓰는 날 마이가 왔다.

왜소한 체구에  여전히 앳되고 깡마른 모습의  마이는,  목에 손바닥만한 반창고를 붙이고 있었다.

3년 전이 천진난만한 초등학생 모습이었다면,  3년 후의 마이는 여유 있어진 모습에 제법 아줌마 티가 났다.  

나는  3년 만에 만난 그녀에게서 다시 눈을 떼지 못했다.

교통체증으로 좀 늦어진다는 매도인을 기다리면서 남편이 말했다.

집사람은  남들보다 손이 빨라서  두배씩 쉬지 않고 일했어요. 공장이나 식당에서는 베트남 여자들을 좋아해요. 야무지고 생활력이 강하잖아요. 마이는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는데,  일 끝나면 집에 와서 베트남으로 가고 싶다고 울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목에 도톰한 혹이 생겨서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조직검사를 권했다.

갑상선암 1기. 수술을 했다.


쉬지 않고 죽어라 일하면서도 날마다 베트남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울던 어린 아내가 병이 나자 남편이 물었다.


베트남으로 데려다줄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한국에서 살래요...

베트남은 암에 걸려도 몇 달씩 기다려야 치료를 받을 수 있다고 한다. 병원에 가면 대기 서류가 산더미인데,  의사한테 따로 돈이라도 찔러줘야 비로소 진찰을 해준다고 했다. 보험 처리 한다고 하면 또 서류를 뒤로 밀쳐놓기 때문에 돈이 없으면 진찰도 수술도 하세월이라 했다.

아프기 전에는 낯선 타국에서 차가운 시선 받으며 기계처럼 일하는 것이 너무 서글퍼서 고향이 그리웠는데, 아프고 나니 이 나라가 좋아졌다.  바로 입원도 시켜주고 수술도 해주고 보험으로 거의 다 처리가 되다니!

그녀는 결심했다. 아들의 미래를 위해서도 한국에서 계속 살기로...

내  딸아이 초등학생 때보다 더 작고 가녀린 그녀,  마이가 어눌한 한국어로 말했다.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었어요.
남편이 너무 늙어서 갑자기 죽어버리면  나는 아이를  데리고 어떻게 사나 날마다  걱정했어요.

그래서  집으로 가고 싶기만 했는데,  아프고 나니 아이를 위해서도 한국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이는 한국에서 살테니 자기 이름으로 집을 사달라고 했다.

하노이 인근 산간마을의  딸만 넷 있는 집 장녀인 마이는,
고등학교 때  아오자이를 입고 베트남의 어느 절에 놀러 갔다가  점을 보게 되었다.

너는 아주 나이 많은 외국 남자랑 결혼하게 될 거야.
그 남자는 너보다 나이 많은 아들이 둘이 있어.
그 남자랑 아들을 낳는데 그 아들이 커서 가수가 될 거야.

살면서 하나하나 맞아가니 머리가 쭈뼛쭈뼛 선다고 몸서리를 쳤다.

현재는 수술을 하느라  잠시 쉬고 있다고 했다.  마침 매도인이 인근에서 단추공장을 한다고 하니 남편이 말했다.

우리 집사람이  손이 빠르고 야무져요~
그러니 두 사람 몫을  할 거예요.
마침 잘됐네... 갑상선암 수술하느라 일을 그만뒀는데,   우리 집사람 좀 거기 취직시켜주세요

"안돼요!!"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수술한 지 얼마나 됐다고 ~ 당분간은 몸조리 하면서 맛난 것 먹고 쉬어요."

마이의 시선이 내게로 왔다. 베트남 눈빛은 저리 슬픈가...

계약서철을 정리해 넘겨줘도 여전히 시선을 거두지 않길래

 마이!  언제든 밥 먹으러 와~  

맛있는 거 사줄게. 언제든 밥 먹으러 와요~

중개업을 하다 보니 이런 인생도 만나고  저런 인생도 만나고
100건의 계약에  100개의 인생을 만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인생도 있고  '이해' 해서는 안 되는 인생도 있다.

빈한한 나라에 태어난 걸 운명으로 여겨 그저 안쓰러워 해야 하나,
태어나는 곳을 선택할 수 없는 생체의 신비를 팔자로 돌리고 우리는 운이 좋았다고 가슴을 쓸어내려야 하나...

더불어 낙후되고 빈곤한 지역일수록 인생을 걸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여자들의 삶이 언제쯤 지구 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인지...

이 세상에서 겪는 삶의 경험이 자신의 발전에 더 이상 필요치 않는 경지에 도달할 때 비로소 이 세상으로의 윤회가 끝난다고 하는데, 슬픈 그녀들의 다음 생에선 보상받는 삶이 기다리고 있길,,,  

중개업을 했던 오랜 기간 동안  다문화가족을 꽤 많이 보았다.  그 가족들은 행복하기보다 늘 일정한 패턴으로 소란했다.  국경과 문화를 넘어 새로운 가정을 꾸린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이겠냐마는, 불행하게도 한국의 다문화가정은 감수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중 가장 큰 문제가 경제적 어려움이다.  경제적인 이유로 다문화 가정을 형성했지만 그 가정의 평화를 깨는 것도 역시 경제이다.  


한국으로 시집온 그녀들은 게으를 여유가 없다. 일의 종류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먹고 사는데 보태고  또 멀리 친정집으로도 보낸다.  국제결혼을 할 때부터 일정 시기, 일정 금액을 본국으로 송금하는 조건이기 때문에 남편의 경제상황이 받쳐주지 못하면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겨난다. 그래서 가정을 쉽게 깨기도 한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이 새로 형성한 가정보다 자신이 태생적으로 포함돼 있던 가정에 대한 숙명적인 책임감, 절대적인 의무감에서 못 벗어나는듯 하다.  작고 가녀린 수많은 '마이'들의 어깨에는  한국 하늘만 쳐다보는 빈한한 가족들이 있다.  평생  그 무게를 어찌 다 견디랴.


한국인인 나는 왜 한국의 '그'들보다 타국의 '그녀'들에게 더 마음이 쓰일까...


쇼핑 가자고 성화 부리는 딸아이를 픽업하러 나오다,
마이네 가족이 사는 단독주택 모퉁이를 돌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 마이!   언제든 밥 먹으러 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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