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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Jan 09. 2021

장롱 속에서 나온 인연

"ㅋㅋ  무슨 007 작전 같아요~ "

세입자가 집을 내놓았는데 조건이 까다롭다고 직원이 큭큭거렸다.

1. 집은 언제든지 볼 수 있다.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20분 후에 오라~
2. 현관문은 열어놓을 테니
다 본 후에는 반드시  닫고 나가라~


몇 번 집을 보았는데 메시지를 보내고 가니 정말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단다.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기분 탓인지 유난히 서늘한 느낌이 들더라고 다.

며칠 후 저녁,
내가 직접 그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문자메시지를 보낸 지 20분 후에 도착하니 현관문은 열려 있는데... 집은 모두 소등되어 컴컴했다.

스위치를 찾아 불을 켜고 보니 집은 깔끔한데 들은 대로 서늘했다.
아무도 없는데.. 뭔가 있는 듯한.. 어디 고양이라도 숨어서 째리고 있나.....?

서늘한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뭔가가 안 맞았는지
전월세 매물 귀한 와중에도 쉬이 계약이 안돼 애가 타는데, 임대인은  세입자가 빨리 나가고 싶어 하니 서둘러달라고 재촉 전화를 해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역시 활짝 열린 현관을 지나 어두컴컴한 거실의 불을 켜고 이 저 방을 둘러보고 다니다가,
손님이 주방 쪽을 살펴보는 사이  안방에 불을 끄러 들어갔는데..

'엄마... 쉬....'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을 지를 뻔하다가 꿀꺽 삼키고  얼음처럼  굳어 섰는데  다시..

'쉬... 쉬 마려..'

재빨리 안방 불을 끈 다음에
거실로 나와 손님을 잡아끌고  짐짓 큰 소리로

" 이제 다 봤으니 가시죠~"
하고 현관문을 소리나게 닫고 나왔다.

사무실로 오자마자 고객정보가 들어있는 파일을 열었다.

15년 전에 충청도에서  두 자매가 짐 보따리를 들고 올라와 당시 공실이었던 이 집에 보증금 3000만 원에 월세로 즉시 입주하였던 기록이 있었다.


집을 둘러본 임대인 할머니가 '뭔 야반도주를 했나 봐. 기본적인 살림살이도 없네 ㅉㅉ ' 하면서 이불 보따리를 챙겨다 주었던 기억이 났다.

그 뒤 두 자매가  열심히 살면서 월세 한번 안 밀린다고  칭찬하는 전화도 왔었는데... 갱신계약을 안 하고 오래 살다 보니 깜빡 잊고 있었다. 

다음날 낮에 과일 한 봉지를 사서 문을 두드렸다.
누군가 있을 것 같은데 한참을 기다려도 답이 없었다.
사무실로 돌아와  문자메시지를 한 후 20분 후에 다시 올라갔다. 문은 열려 있고 불은 꺼져 있었다.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집에 있는 거 알아요. 나 혼자 왔어요. 이야기 좀 해요..."

정적이 흘렀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이렇게  숨어서 집을 보여주면 집 안 나가... 잠깐 나와봐요 이야기 좀 하게."

잠시 후... 뭔가 쿵 하는 소리가 나고... 그리고 부스럭대다가 다시 5분쯤 후에 휠체어를 탄 여자와  3~4살쯤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나왔다.
예전의 상큼함과 윤기를 잃어버린 지치고 불안해진 표정의 여인. 자매 중 동생이었다. 




8년 전 어느 날 새벽,  
인근 아파트 앞 대로변에서 덤프트럭과 승용차가 충돌해서 반파되었다는 소식이 조그만 동네를 들썩였다.


결혼해서 필리핀으로 넘어가 사업하고 있던 언니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아침 일찍 고향 어머니 산소를 향해 이동하다가,  그만 신호가 변경되자마자 주행하던 덤프트럭과 충돌했다고 다.

그 사고로 다리를 못쓰게 된  동생을 두고 눈물을 머금고  필리핀으로 돌아가야 했던 언니.
그리고 혼자 남아 치료를 받고 변함없는 사랑을 쏟아준 남자 친구와의 사이에 아이까지 생겼으나, 불구 며느리를 볼 수는 없다고 악을 써대다 혼절해버린 시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해서 결국 헤어지고  혼자 아이를 낳은 후  칩거하다시피 살고 있다고 다.

사고로 받은 보험금으로 생계를 유지해오고 있었는데, 필리핀의 언니가  그러지 말고 집을 사서 휠체어 타고 다니기 편하도록 수리한 후에 이사 들어가라고 설득해 고민 끝에 이사를 결정하게 됐다고 했다.

하지만 사고로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낯선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을 어찌 볼까 두려워,  집 보러 오겠다는 통보를 받을 때마다  휠체어를 보자기로 씌워놓고  아이와 함께 장롱 속에 숨어들었던 것이다.

우선 이사 갈 집부터 매수하기로 했다.  현재 거주 중인  집의  보증금 3000만 원을 내가  대납한 후  나머지는 담보대출금과 보험금을 합쳐 소유권 이전 등기를 해주었다.


그리고 인테리어 업자를 연결해 휠체어가 다니기 편하도록 수리를 한 후에  이사를 시켰다.
보증금 대납분은  집으로 이삿짐을 옮긴 후에, 공실 상태가 된 집을 다시 월세로 계약해주고 회수했다.  

새 집으로 이사 들어가던 날, 필리핀에서 언니가 날아왔다.


" 중개사님!  예전에 우리가 처음 집 얻으러 왔을 때
우리 자매 보고 너무 이쁘다고 여동생이 없으니 동생 삼고 싶다고 하셨죠?
그 말 잊으셨는지 모르지만 저희는 기억하고 있어요. 저는 너무 멀리 있어서 언니 노릇 못해요.

중개사님이 제 동생 언니가 되어주세요.  우리 OO이랑  제 조카 한 번씩 들여다봐 주세요..."

두 자매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의 재혼으로 집을 나와 오로지 서로만을 의지해 살아왔는데, 어쩔 수 없는 인생역정으로 언니는 낯선 타국 필리핀에서,  동생은 불편한 몸으로  한국에서 혼자 딸을 키우며 살게 되었다.


필리핀에 벌려놓은 사업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면 남편을 설득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든지, 아니면 동생을 필리핀으로 불러갈 계획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참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각자 이미  경로가  정해진 것처럼 일정한 패턴대로 움직이고 있다.
그러다 각각 어느 접점에서 조우하게 되는데, 서로 어긋나고 상처가 되는 인연이 있는가 하면
사소한 마음씀이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관계도 있다. 

인생의 어느 경로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게
사소한 뭔가라도  해줄 수 있는  중개사라는 직업을 선택하길 참  잘했다고.... 나는 가끔 생각한다.

오늘도 장롱문을 열고 내게 다가올 또 다른 인연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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