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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Oct 03. 2020

남편이 빡빡이가 되어 돌아왔다.

" 야야   그 아줌마야 그 아줌마!.."

아들이랑 미용실 갔던  남편이 평소 성격답지 않게
소리를 지르며 뛰어 들어왔다.


 " 그 아줌마야.. 확실해!  그 D아파트..바리깡."

15년 전 여름.
단지에 새로 생긴 미용실로 머리를 자르러 가는
남편  등 뒤에 대고 나는 소리쳤다.

"~원하게 밀어 달라고 해. 날도 더우니까,"

평소엔 그런 말 안 하는데 그날은 왜 그랬을까...
가만히 있어도 온몸의 땀구멍을 열어젖히는 찌는듯한 날씨 탓이었나..

그리고 30분 후에 뛰어들어온 남편은,
문이라도 때려 부쉴 듯이~ 벽이라도 박살낼 듯이~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했다.




30분 ,  새로 생긴 미용실 의자에 앉은 남편은
아내의  주문이 떠올라서 미용사에게 말했다.

" 시~원하게 밀어주세요~!"

그리고 언제나처럼 안경을 벗어 탁자 위에 놓고 눈을 감았는데..
잠시 후 뇌리를 스치는 소리!!

드르륵..

? ? ? ?

깜짝 놀라 눈을 떠보니
정수리부터 일자로 고속도로가.....
그리고 미용사 손에 들려있는 바리깡!
시원하게 밀어달랬더니 진짜 시원하게~
여지없이 시원하게~ 밀어버린 미용사 아주마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지만
워낙  밖에서는 점잖은 척(?) 하는 남편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외마디 비명만..


아....


남편의 표정을 보고
그제야 상황을 알아챈 미용실 아줌마는
연신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렸지만,
머리 한가운데로 고속도로가 났으니
달리  방도가 없어서......... 마저 밀었다..ㅠㅠ

결국 남편은 빡빡이가 되어서 집으로 뛰어들어왔다.
누가 볼까 봐 무서워서 쏜살같이..

그 뒤로 30분간을  방방 뛰었다.
네가 시원하게 밀어달라고만 안 했어도~
( 그게 그 말이 아니지..ㅠㅠ)

아니 왜 미용실 아줌마한테는 한마디도 못하고
돈까지 주고 와서 애먼 마누라한테...

남편은 당장 내일부터 출근을 어찌하냐고 난리난리~
당장 가발을 사 오라고 난리난리.

삼복더위에 가발을 어찌 쓰겠다고..
일단 흥분해서 눈까지 충혈된 남편을 달래고 또 달랬다.

두상이 잘 생겨서 나름 어울린다~
머리는 금방 자랄 거다~
군대 다시 갈 것도 아니고  언제  삭발해보겠냐~
얼굴이 잘 생겨서 머리는 그동안 거들뿐이었네~

달래고 달래니 제풀에 누그러졌는데..
이젠 내가 경기 들릴 판이었다.

TV 보다  눈만 살짝 마주쳐도  소스라치게 놀라고,
밥 먹다가도 허연 머리통 보면 숨이 턱 막히고..
같이 누워 자다가 얼핏 백자 항아리 같은 뒤통수 보면 벌떡 일어나지고..

그 생김새 그 체구에 조폭이 따로 없었다
남편과 눈만 마주쳐도 바로 몸이 알아서  
저절로 전투태세에 돌입..

당시 빛나리라는 예명을 가진 개그맨이랑 가수 구준엽이 인기였는데.. 삭발이 아무나 그렇게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슬픈 사실..ㅠ

다음날 마침 월요일이라  월례조회가 있었다는데,
키 182에 체구 좋고 까무잡잡한  남편이 머리까지  번쩍번쩍..
바로 과장님께 불려 가서,
무슨 불만 있냐고 불만 있으면 좋게 좋게  말로 하라고~
훈계까지 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15년이 흐른 어느 날..
아들이랑  중심상가 미용실에 들어갔던 남편이,
바로 그 미용사를 만난 것이다.
미용사는 당연히 알아보지 못하겠지만,
남편은 당시 밤마다
미용사 얼굴을 떠올리고 이를 갈았으니...ㅋㅋ


당시엔 어려서 기억을 못 했던  아이들이
사연을 듣고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때는  다 때려 부쉴 듯이 방방 뛰던 남편도
이젠 제법 희끗해진 중년 신사가 되어
큭큭거리고 말 뿐이다.


도저히 화를 못 참을 것 같던 일도

이렇게 한바탕 웃어젖히는 추억이 된다.

그게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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