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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Dec 30. 2020

유리창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할 권리 ㅡ행복추구권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데, 마주 오던  30대 남자가  꾸벅 인사를 했다.
조금 멀어지자 같이 걷던 직원한테

' 누구더라? '

했더니 목소리를 급 낮추어 말했다.

"그분 있잖아요. 왜.... 그  행복추구권..."

행 복 추 구 권!

2년 전 전세 잔금을 하는데, 짐을 다  뺀 후 확인하려고 둘러보니 거실 유리창이 희뿌연 상태였다.

거실 유리창은 진공상태로 압축 처리된 이중창인데, 세월의 거센 풍파와 모진 비바람 그리고 잦은 청소 등으로 실리콘 사이 틈이 생겨 습기를 내부로 빨아들이면서 백화 현상이 생긴 것이다.



준공 초기에 이런 현상이 발생하면 시공상의 문제를 들어 하자처리를 요구할 수 있지만,  20년 가까이 된 노후 건물 상태에서는 내부 청소로 문제가 해소되지 않아 새시 자체를 교체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희뿌연 유리창 탓에 모든 것이 지저분해 보인다며 임차인이 교체를 요청했는데, 임대인은 단호했다.

"유리창이 조금 지저분한 건 알지만 ,
여닫기가 어렵거나 불편한  상태는 아니라서 교체까지 해줄 수는 없습니다."

파손이나 고장 등 임대차 목적을 달성할 수 없을 정도의 하자가 아니라면 임대인에게 교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임대인이 못해주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 청소해서 사용해보시는 건 어떻겠냐고 했더니

임차인이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럼 제 행복추구권은요?"

.....????

"제 행복추구권은 어떡하고요?
저는 깨끗한 거실 유리창을 통해 바깥 전경을 감상하고 싶은데요?
그럴 권리가  있지 않나요?"



아... 행복추구권...

솔직히 당황스럽고 ,, 어이없고..... 그러나 신선했다.
중개업을 17년가량 해오는 동안, 갖가지 하자 처리와 분쟁을 중재해 왔지만 단 한 번도 행복추구권을 거론하는 의뢰인은 없었다.

그래서


"주택임대차 보호법에서는 임차인에게 6가지 권리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1. 사용·수익권  2. 임대차등기 협력 청구권 3. 차임 감액청구권  4. 부속물 매수청구권  5. 필요비 상환청구권 6. 유익비 상환청구권.
여기에  별도로 행복추구권을 보장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유리창을 열고 바깥 전경을 감상하시거나,
집 밖으로 나와서 산책하시는 걸로
스스로 행복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창을 교체해달라고 요구하면 어떡하지? 걱정했는데  
임차인은 6가지 권리에 눌렸는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마무리됐지만, 잊고 살던 추상적인 권리 행복추구권은 내내  머릿속에 맴돌았다.

깨끗한 창으로 바깥 풍경을 감상할 권리,
행복추구권을 주장하다니  멋지지  않은가...

모든 특별법에 행복추구권이 별도로 포함되지 않는 이유는
헌법 제10조에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헌법에 행복추구권이 있다는 것도, 그걸 어떻게 행사해야 하는 지도 잊고 사는 게 우리들 삶이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여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  '계약갱신청구권'이 임차인의 7번째 권리로 추가되었다.  계약갱신청구권 덕분에  행복해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분쟁이 속출하고 오히려 급상승한 전세가와 씨가 말라버린 전세물량 때문에 불행해진 임차인, 임대인들이 많아졌다.

추상적인 행복에 대한 추구권을 법으로까지 규정한 건 그만큼 모두가 행복을 갈구하며 살고 있다는 반증인데, 임차인의 '그 행복'을 위해 생겨난 하위법이 오히려 모두를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하고 있다. 


2년 전 행복추구권을 주장했던 임차인은  전세 만기 시점에 임대인이 집을 파는 것에 동의했다가, 막상 이사 나갈 곳을 찾아보니 마땅치 않아  홍남기 부총리의 사례를 들어 이사 지원금을 요청했고 다행히 소액에 합의가 되었다.



이사 나가는 날, 그동안 잘 살았다고 인사하며 임차인은  잠시 희뿌연 유리창 이야기를 꺼냈다.
혹시나 2년 전 일을 잊은 임대인이 임차인의 관리 부주의 때문에 유리창이 훼손됐다고 생각할까 봐, '입주 시점부터 원래 희뿌연 상태였다'라고 상기시켜 준 것이다.


임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유리창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어요.  행복추구권...' 이라며 살짝 웃었다.


나도 웃었다. 임차인도 웃었다.  모두가 웃으니 매수인도 덩달아 웃었다.

주택임대차 보호법은 이래야 한다. 임대인이고 임차인이고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대한민국 최상위 헌법 제10조 '행복추구권'에 위배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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