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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Dec 27. 2020

커피 한 잔 더 하실래요?

한가한 오후 시간, 쭈뼛쭈뼛 들어선 남자가 있었다.  

10여 년 전에 두 블록 떨어진 아파트 매물을 접수해서 매매해준 걸로 첫 번째 인연이 되어,  그 뒤 1년쯤 후  다시 어느 단지 아파트 매물이 접수돼 계약했는데 매도인이 바로 이분이었다.

계약 날 와서

"저 모르시겠어요? 1년 전에 00 아파트도 중개사님이 팔아주셨는데....''

여러 중개사무소에 내놓은 타 단지 매물을 전화로 접수받고 두 번이나 거래를 성사시켰으니 나름 특별한 인연이었다.

연배가 비슷한 이 손님은 그 후로도 세 번이나 거래를 했다.  처음엔 소형 평형 전세로, 다음엔  소형 평형 매매로  집을 사서 옮겼다가 아이들이 좀 크니 담보대출을 full로 받아서 중형 평형대를 사서  입주했다.

말수도 별반 없고 요구사항도 많지 않고 중개사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참한 고객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전화를 하여 '현재 거주 중인 집을 와이프 명의로 바꾸려면 어찌해야 하냐' 고 물어서 바쁜 시간 대였는지라  법무사 사무장 하고 연결해주었다.  이틀쯤 후 갑자기 생각나서 법무사 사무장한테 잘 상담해드렸느냐고 확인했더니, 증여세 등 여러 문제로 이전을 보류했다고만 알려주었다.

 그래서  '왜 갑자기 와이프 명의로 넘기려고 한 거지?....' 갸우뚱하다 말았는데 직접 찾아온 것이다.

증여와 매매의 차이에 대해 묻길래 간단히 설명해주었더니... 취득세 등 이전 비용을 새로 내야 하는 걸 미처 생각 못했다고, 비용이 많이 들어서 못할 것 같다고 말을 흐렸다.  그러고서도 한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앉아있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여 커피를 타서 건넸다.

왜 명의를 이전하려 하신 건가요?

살짝 웃더니 커피잔만 만지작거렸다.

부부간에 아파트 명의를 이전한다는데 중개사가 관심 둘 일은 아니다. 그런데 단순히 증여의 목적이었다면 세금 때문에 마음을 접었으면서도 일부러 방문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포기해야겠다고 하면서도 아직 용무가 안 끝난냥 자리를 지키고 있진 않을 것이다.

입을 꾹 다물고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는 손님께
차분한 수다를 떨었다.

"취득 시점이 아니라 보유 중간에 갑자기 명의 이전을 하려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더구나 부부간 명의변경을 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 사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 사유는, 사업이 잘 안되거나 가정 경제에 문제가 생겨서  가압류 등의 채무 청구가 들어올까 염려되어 은닉하려는 목적이 있을 경우이다. 또한 세금 회피가 원인이 되기도 한다.

만약 그런 경우라면, 부부간 증여는 의미가 없다.
채무변제를 피할 목적으로 부부간에 명의를 이전한다면, 채권자 측에서 사해행위로 소송을 할 가능성이 높다.  

매매의 경우와 달리 증여로 취득한 경우는
취득세율이  높은데, 사해행위 소송이 들어오면
많은 돈을 들여서 이전한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부부 중 한쪽이  '내 명의로 해달라'라고 요구하는 경우인데... 혹시 사모님이 명의 이전을 원하시나요?"

두 번째는 일반 가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지만,  다문화가정에서도  많이 일어나는 현상이다.

젊은 동남아 여성이 나이 많은 한국 남성한테 시집을 오는 이유는 돈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결혼 조건에 친정집에 매년 혹은 매월 얼마를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미리 해줘야 한다.

그런데 돈을 약속한 대로 못 보내주면 위기감을 느껴 부동산을 이전해달라고 요구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다. 그런 요건이 충족 안되면  아이를 둘러업고 본국으로 떠나기도 한다.

"두 가지가 다 해당됩니다."

눈빛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멋쩍게 웃었다.

필리핀 와이프와  두 아이를 낳고 사는데 작년 10월부터 장인, 장모가 와서 거주하고 있단다. 한국에 시집 온 딸이 큰 집을 사서 이사했다 하니 당분간 머무르면서 일자리도 찾아볼 계획이었다.  필리핀 장인 장모는 사위가 퇴근해오는 밤마다 몇만 원씩 용돈을 받았다. 돈 잘 번다는 한국 사위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건축업을 하는데 경기가 악화되어 몇 달째 일거리가 없는 상황. 일거리가 있는 곳이라면 일당을 받고서라도 쫓아다녔는데 간혹 지방까지 원정 가서 잡무를 처리하고 며칠 만에 귀가해도 그때마다 장인, 장모께 5만 원 10만 원씩 용돈을 쥐어드려야 했다.

불경기가 계속돼 수입원은 없고, 여기저기서 자재값 독촉이 거세진  와중에도 그걸 내색할 수는 없었다. 집에 가져다주는 생활비가 갈수록 줄어드니 뭔가 불안함을 느낀 와이프가 자기 명의로 집을 이전해달라고 우기는 참이고, 더불어서 여기저기 채무로 혹시나 집에 압류 들어올까 싶어 밤잠을 설친다고 했다.

말수도 없고 점잖은 분이 오죽하면 내게 와서 저런 말을 할까....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자존심이 상하고 초라함을 느끼면 어찌 하나 걱정이 되었다.
저런 말 부모형제에게도,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차마 못 꺼냈을 텐데.... 다섯 번의 거래를 하면서 중개사와 고객으로서의 거리가 다섯 구비는 좁혀진 걸까.

열심히 일하고 마음 착한 가장이 위풍당당해질 수 있는 그런 사회는 언제 오는 것일까..
국내 불경기로 인한 어려움과 이해타산이 심한 다문화가정이라는 이중고 속에서, 어느 볕 좋은 오후에  중개사를 찾아와 쑥스러운 속내를 털어놓아야 하는 고단한 가장의 어깨가 안쓰럽다.

커피 한 잔 더 하실래요?


손님은 커피 한 잔을 더 마시고  한참을 말 없이 앉아 있다가 쓸쓸히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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