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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Feb 21. 2021

착한 임대인, 더 착한 임차인

2년 전 2월,

미루고 미뤄온 전세계약이 있었다.

전세 의뢰자는 9년 전에  인근 아파트에 공동중개로  전세계약을 체결해준 임차인이었다.
선순위 융자금이 많아 전세보증금이 시세보다 저렴한 집이었다. 선순위 근저당권과 보증금의 합계액이 해당 매물 시세의 70%를 넘으면 깡통전세의 위험이 있어 권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배부른 신부의  손을 잡고 온 어린 신랑은 융자금이 많아 위험하다고 여러 번 만류했는데도
"돈이 없으니 그 집이라도 들어가게 해 달라" 고 졸라댔다.  

사실 집도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가지고 있는 자금을 이야기하며 부탁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안내하였고, 망설이고 망설이다 계약을 진행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안 좋은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이후 집값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자 부도난 임대인이 손을 들어버렸다.

그 후  임차인이 간간이 상담전화를 해오곤 했는데, 그때마다 부채감에 괴로웠다. 그러나 임차인은 한 번도 나를 원망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계약 당시  리스크를 설명해주며 만류했던 걸 고마워했다.

" 중개사님 말씀이 맞았어요. 혹시 이렇게 될까 봐 걱정하며 말리셨는데, 고집을 부려서 또 이렇게 부담을 드리네요.  그래도 우리 조건으로는 이 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로는 별반 연락이 없었다.
무수한 손님과 무수한 계약들 사이에 파묻혀 살았지만, 나는 그들을 처음 만난 그날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 아파트 단지에 임장활동을 나가거나 주변을 지나칠 때는 어김없이 괴로워졌다. 어떻게 되었을까? 경매 넘어가서 쫓겨났을까?

그런데 어느 날, 임차인이 두 아이의 아빠가 되어 찾아왔다. 이사를 가게 되었으니 새 전세계약자를 구해달라고 했다.

그간 경매라도 넘어가서 돈 한 푼 못 받고 쫓겨나게 될까봐 자다가도 눈이 떠졌는데, 임차인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임대인을 위해 수년째 은행이자의 50%를 내오고 있다고 했다. 임차인이 50%의 이자를 부담하겠다고 하니 임대인은 그 마음에 감복하여 나머지 50%의 이자를 어떻게든 마련하였고 덕분에 아직까지 압류조치나 강제경매 없이 유지되고 있다고 했다.

그간 열심히 일하여 새 아파트를 분양받아 입주하게 되었으니 살고 있던 전세보증금을 반환받아야 하는데,
역시나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해줄 여력이 안되니 새로 전세입자를 맞춰야 한다고 했다.

현재 조건으로는 융자금이 많아서 계약자가 나타나기 어려우니 본인이 융자금의 일부를 상환해주는 조건으로 전세를 놓을 것이고, 새로 입주하는 임차인의 안전을 위해 이사 나간 후에도 50%의 은행이자는 계속해서
책임지고 납부할 거라고 했다.

예상 못했던 조건에 당황하여 그렇게까지 해야 하냐고 묻자, 아직은 임대인  명의로 두고 있지만 일정한 기간이 지나면  시세 차액을 계산해주고 소유권을 넘겨받을 계획도 가지고 있으니 새 임차인의 안전에 대해서는 걱정 말라고 했다.

내 귀를 의심했다. 그간 깡통전세가 되어 임차인이 울며 겨자 먹기로 인수하거나 강제경매 처리되어 길거리로 나앉게 되는 스토리는 여러 번 보아왔지만, 임차인이 임대인의 이자를 대신 부담해주다니...

전세가 귀한 시기라 바로 계약자가 나타났는데, 나는 계약을 진행할 수가 없었다..

잔금일에 진짜로 융자금의 일부가 상환될 수 있을까? 거주하고 있을 때야 거리로 나앉지 않으려고 이자를 대신 부담하고 유지해왔다지만, 보증금을 받고 이사 나간 후에도 은행이자의 50%를 계속 내준다는 걸 믿을 수 있을까...

또한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다던 임대인이 과연 이자의 50%를 계속 낼 수 있을 것인가.. 둘 중 누구라도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포기하거나 약속을 어겨버리면 새로운 임차인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 아.. 이 계약으로 또 다른 피해자가 생기는 건 아닐까....


나는 중개사로서의 고민에 빠져 몇 날 몇일을 허우적댔다.
계약하겠다는 손님이 나타났어도 2주 넘게  미루고 미루다  결국 양방의 재촉으로 계약을 진행하게 되었다.

임대인과 임차인, 그리고 새로운 계약자를 앉혀놓고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  계약서의 특약사항을 최대한 상세히 써놓고 분위기가 아니다 싶으면 '판을 깨는 걸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한 시간 후 상황이 달라졌다.


" 이 집은 내 집이 아니에요. 명의만 내 이름일 뿐 세입자 분 집이에요. 오래전에 포기했는데 젊은 분들 호의가 고마워서 유지해온 거예요.   한때 다 포기하고 세상 뜨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이 집 이자 내기로 한 약속 지키려고 죽어라 일하다 보니 조금씩 돈도 모이고 형편도 나아졌어요."


임대인은 그동안  임차인에게 이자를 내게 한 것이 너무 미안해서 이자를 다 변제하고  집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는  진정성을 보였고, 임차인은 포기하지 않고 잘 유지해준 것만도 고마우니  보답을 하겠다며 본인이 승승장구 키워놓은 회사에  좋은 조건으로 일자리를 권유했다.

임대인은 남편의 사업실패 후 이혼하고 어렵게 생계를 유지해온 이야기며, 깡통주택인 이 집을 포기하고 살길이나 찾으라는 주변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임차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힘든 노동일로 근근이 버티면서도 은행이자를 내온 사연을 털어놓았다.

임차인 역시 혼인신고 전 배부른 어린 신부를 끌고 우리 중개사무소를 찾아온 후 불안정한 일자리를 전전하며 몇 번의 좌절 끝에, 매출 높은 회사의 오너로  자리 잡은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신뢰와 약속의 감동스토리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부끄러워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불측의 사고에 휘말릴 것을 염려하여  중개사의 이기심으로 회피하고 싶어 했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계약을 미뤄온 상황이 미안해졌다.

그들은 계약에 대해 부대껴온 내 속마음을 알지 못하니, 자신들을 믿고 기다려주며 정직하게 중개해준 것을 오히려 고마워했다. 심지어 그렇게 좋은 인연을 임대인과 임차인으로 엮어준 것마저 고맙다고 했다.


계약 후 한동안, 의뢰인을 믿지 못해 계약서 쓰는 걸  2주나 미뤄온 나는 과연 중개사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인가 자책하였다. 그러나 그런 분들을 서로 연결해주고 만날 수 있는 중개사가 된  것이 오랜만에  행복했다.


중개업을 하는 18년 동안, 임대인과 임차인이 서로 고통을 분담하며 신뢰를 지켜갈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나는 이제라도 알게 되었지만,  이  사회에는 그걸 알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얼마 후,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소유권을 넘겨주었고 극구 사양하는 임대인에게 임차인은 매매잔금을 송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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