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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Mar 10. 2021

Oh~My  꽈리고추 볶음!

화재경보 대피 소동

아침 8시.
7시부터 눈은 떴으나 남편이 왔다 갔다 분주히 출근 준비하는 모습을 이불속에서 빼꼼거리고 구경만 했다. 뭔가 꾸물대고 싶은 아침이 한 번씩 찾아오는데 바로 그런 날이었다.  누운 채로 폰을 뒤적이며 웹툰도 보고 뉴스도 찾아 읽던 중 문득 오전 10시 약속이 생각났다.

아... 재계약서.

전세보증금을 증액하여 재계약을 하는 세대가 있는데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걸 깜빡한 것이다.

아이쿠야 늦겠네. 이놈의 정신머리..

부랴부랴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아침 출근 전에 저녁 반찬거리를 준비해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나보다 일찍 퇴근한 가족들이 편히 식사를 한다.  순두부찌개를 간단히 끓여 놓은 후  꽈리고추 볶음을 하기로 했다.  갈비찜에 이은 나의 필살기 꽈리고추 볶음! 룰루~

꽈리고추를 다듬으면서 카톡으로 들어온 상담문의에 답하고,

꽈리고추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기 시작하면서 블로그 댓글을  확인하고,  

꽈리고추가 자글거리기 시작하는 프라이팬에  잔멸치를 섞어 넣으면서 의뢰 전화를 받는 와중에

어디선가 계속 웅얼웅얼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바쁘다 바빠 아랑곳 않고 꽈리고추를 볶다가  갑자기
'근데 저 10분째 계속되는 방송은 뭐지?'  하는 궁금증이 들었다. 아침부터 무슨 방송?
거실 쪽으로 나가보니 볼륨을 줄여놓은 인터폰 스피커에서 일정한 톤으로 안내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무슨 소리야? 가까이 가서 귀를 바짝 대고 들어 보니....

"본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히 건물 밖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삑삑"

"본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히 건물 밖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삑삑"

헐~~~ 10분 전부터 저렇게 점잖게 화재사실을 알리고 있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나는 듯도 했다. 킁킁

아이고 뭔가 끊임없이 웅얼대는 소리가 한참 전부터 들렸는데 그럼  다 도망가고 나만 남아 있는 거 아냐?


허겁지겁 발코니로 나가 내다보니 봄꽃 같은 초등학생 아이들 셋이 엉켜서 뛰어가고 있었다.



겁이 덜컥 났다. 나도 얼른 도망가야지!
헐레벌떡 현관 쪽으로 뛰어 나가다 보니, 현관 전신 거울에 비친 내 모습. 딸이 유치하다고 흉본 핑크색 땡땡이 잠옷을 입고  사방팔방으로 뻗치고 엉킨 전쟁터의 폭탄 머리에다  한 손에는 볶음용 주걱을 든 아줌마...

아이고오~
이건 좀 심하다~

주걱을 휙 집어던지고 부랴부랴 안방으로 달려가서, 손에 잡히는 대로 외투를 걸쳐 입고 나오려다 생각해보니
시간상으로 바로 출근해야 하는데 머리도 못 감고 씻지도 못하고?

아이고 이 몰골로 어떻게 계약을 해. 손님들이 못 알아보고 기겁하겠다.


게다가  점심 약속이랑 오후 빡빡한 일정을 어찌.....

할 수 없다 머리라도 감자!

다시 욕실로 기어 들어가려는데 웅얼웅얼 삑삑 계속되는 화재경보...

"본 건물에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신속히 건물 밖으로 대피해주시기 바랍니다! 삑삑"

아이고오~. 이러다가 불길 확 번져서 나만 갇히는 거 아냐?
TV 뉴스에 모 아파트에서 화재가 나서  모두 탈출했는데 공인중개사 아줌마만 머리 감느라 못 나왔다고 방송 타는 거 아녀....?

아 이런~
머리를 물에 적시다 말고 다시 욕실에서 돌아 나왔다. 시간이 없으니  물이 뚝뚝 떨어지는 머리에  일단 모자를 뒤집어쓰고 잠옷 위에 재킷을 걸쳐 입다가

그래  관리사무소!
전화했더니 통화 중.. 아 통화 중.. 또 통화 중
이 판국에 전화가 될 리 없지...

타는 냄새가 더 심해졌다 킁킁.,
맞아 집에 있는 귀중품은 챙겨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생각나는 대로 몇 개 뒤져서 가방에 주워 담다가

아이고 이러다가 타 죽는 거 아냐?  죽으면 이런 게 다 무슨 상관

다시 부랴부랴 현관으로 튀어나오다 혹시나 하고 경비실로 인터폰 해보니 받았다.

나:(다급히) 아저씨 불났나요?? 
경비아저씨:(심드렁)  오보입니다.. 기계 오작동입니다. 불 안 났어요.

휴..... 그러면 그렇지.. 머리는 감을 수 있겠네... 아이고 다행이다.

하고 외투를 벗어던지고 욕실 쪽을 향해 가다가

근데 타는 냄새는 뭐지? 아까부터 계속 났는데?


앗! 그러고 보니 주방 쪽에서 연기도...?
...
...
...

Oh~My  꽈리고추 볶음....!!



퇴근하면서 보니 엘리베이터에 안내문이 붙었다.

그리고 그날 밤 가족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멸시를 한 몸에 받았다.


화재 났다 하면 무조건 밖으로 튀어야지

무슨 머리를 감고 금품을 챙겨!

제정신이야?!?!

.

.

.

난 속물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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