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봄바람에 흩날리는 벚꽃 잎처럼 나긋나긋하던 슈퍼 아줌마 목소리가 겨울바람처럼 거칠었다. 뒤이어 기죽은 듯 따라 들어온 미소년 외모의 세탁소 사장. 그리고 까만 차이나 컬러 가죽점퍼를 입은 채 잔뜩 못마땅한 표정으로 꼬리 물고 온 호프집 사장. 어지간해서 한자리에 모이는 법이 없는 어색한 조합이다.
며칠 전부터 이상한 낌새가 보이긴 했다. 상가 공동화장실 변기가 자주 막혀서 설비업자를 불러 20여만 원을 들여 두 번이나 뚫었는데 또 막혔단다. 관리비가 평월보다 2배 가까이 많은 명세서를 보고 '아이고 뭐가 이렇게 많아'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즘에 슈퍼에 물건을 사러 가니 옷깃을 잡아당겼다.
"호프집에서 치킨 튀긴 기름을 화장실 변기에 자꾸 버린대요. 청소아줌마가 오래전부터 말했거든요. 변기랑 바닥에 벌건 기름이 덕지덕지 끼어있다고."
사실 난 상가 관리에 다소 무심한 편이다. 그런데 오래 전부터 화장실에 누군가가 폐유를 버리는 정황이 포착되었고, 또 누군가가 기름을 출렁이게 담은 양동이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가는 호프의 뒷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그래서 변기에 기름을 버리면 안 된다 하수구가 막힌다고 했더니 "기름은 흘러내리니 상관없다" 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줄 거니 걱정 안 해도 된다"라고 했단다.
기름을 붓든 호프를 붓든 안 막혔으면 문제가 없었을 수 있다. 오랫동안 한 상가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으니 서로 가급적 얼굴 붉히는 소리는 하기 싫었으니까... 그래서 베트남 출신 청소아줌마가 기름기가 범벅이어서 청소하기 너무 힘들다고 몇 번 푸념을 해도 슬쩍 흘러 넘겼다.
그런데 장기간 기름을 부어대니 온전할 리가 있겠는가.. 결국 변기는 뚫어놔도 막히고 뚫어놔도 역류했다. 참다못한 세탁소가
"변기에 기름을 부으시니 막히는 거예요"
라고 한마디 했고,, 호프는 나이도 어리고 상가 후발주자인 세탁소가 감히 거슬리는 소리를 한 것이 분했다. 그래서 밤중에 전화를 하여 "나이도 어린 XX가!" 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잔뜩 겁에 질린 세탁소는 다음날은 문을 닫아놓고 안 열더니, 그다음 날부터는 문을 여는 대신 입을 닫았다.
당연한 말을 한 것인데, 입장이 다르고, 감정이 쌓이다 보니 오해도 쌓였다. 세탁소는 미용실이 호프를 옹호했다는 말을 슈퍼한테 전달했고 슈퍼는 미용실로 찾아가서 자초지종을 다시 설명했다. 마지막 꽃샘추위가 벚꽃잎을 심하게 흔들어대던 4월 중순, 그 망할 넘의 하수구가 10여 년을 동거 동락하던 상가 사람들 사이를 거칠게 흔들었다.
결국 모두들 부동산 사무실로 몰려왔다. 이미 남자화장실 변기는 또 역류를 시작했고, 이젠 몇 십만 원 들여 변기 뚫는 걸로 해결될 사안도 아니었다. 서로 자기 말이 맞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퇴근 후 집 보기로 선약되어 찾아온 젊은 부부가 놀라서 다시 나가버릴 정도였다.
"변기에 기름 부으면 굳어서 막힙니다. 화장실 변기와 바닥에 기름이 낭자하다면 우리들 중에 누구일 거잖아요. 현재로선 기름 쓸 사람이 호프집밖에 없고 또 몇 분이 보셨다 하니 무조건 아니라고 하셔도 인정되기 어렵습니다. 내일 설비업자를 불러서 하수도를 뜯게 하고 만약 하수도 역류의 원인이 기름으로 밝혀지면 수리비를 부담하셔야 합니다."
원래 이 세상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게 나름 진리다. 그래서 눈 부릅뜨고 목소리에 쇳가루를 깔면 일단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런데 또 그 크고 거친 목소리가 힘을 못 쓰는 유일한 논리가 다수결이다. 누군가 봤다 하고 까보자 하니 가죽점퍼만큼이나 빡빡한 호프가 한 코 꺾였다.
기름이 원인이라면 수리비를 부담하겠다.
그런데 아닐 거다!
다음날 설비업자가 와서 기계를 이용해 변기 밑으로 작업을 시작했는데 어찌나 단단히 막혔던지 스프링이 헛돌아 손이 빨려 들어가는 사태가 났다. 손이 찢어지자 결국 동료 업자를 불러 함께 작업을 했는데, 아무리 드드득 기계를 돌려대도 막힌 곳이 뚫리지 않았다.
상가 사람들의 온 관심은 변기와 하수구로 쏠렸다. 슈퍼는 시간만 나면 하수구 앞으로 와서 지켜보다 손님이 불러대면 달려가고 달려왔다. 호프는 오후 장사임에도 평소보다 빨리 나와 설비업자 옆에 바짝 붙어서 '나는 잘 못 한 것도 없는데 상가 사람들이죄다 몰아붙인다'라고 하소연을 해댔다. 세탁소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멀리서만 힐끔거릴 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모두의 관심사는 하수구 막힘의 원인이 과연 기름일까 아니면 다른 폐기물일까 였다. 기름이면 그간의 논란을 호프가 모두 책임지고 처리하는 것이고, 기름 외 다른 원인이면 1/N로 공정히 처리하고 종지부를 찍기로 했다.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야 겨우 스프링이 작동되어 하수구가 뚫렸다. 누런 물이 콸콸 쏟아졌다. 호프가 제일 먼저 뛰어나왔다.
"기름이 아니죠? 기름이 없죠? 거 봐요 내가 뭐랬어!"
막걸리 같은 물이 콸콸 쏟아질 뿐 끈적한 기름덩어리 같은 건 눈에 띄지 않았다. 풀이 죽은 슈퍼가 나를 쳐다보며 1/N!이라고 속삭였다. 바로 그때 옆 정화조 뚜껑을 열더니 또 다른 설비업자가 말했다.
"기름덩어린 이쪽에 있어요.
거기론 물만 빠져나간 거고, 기름덩어린 여기로 쏟아졌지요."
무슨 놈의 하수구가 오스카상 주연도 아니고 반전의 연속이다.
우웩.... 말로 표현하기 싫은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사이로 얼핏 돌덩이 같기도 한 크고 작은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설비업자가 건져내니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암괴석 같은 덩어리들이 흉하게 늘어섰다.
슈퍼가 소리쳤다.
맞아 저게 기름덩어리야!
기름이 오래되면 저렇게 단단해져서 돌덩이같이 된대.
내가 뭐랬어. 십여 년 동안 밤마다 기름을 부어대니 온전할 리가 있겠어요?
호프가 위생장갑을 끼고 다시 나왔다. 그리고 기름덩어리의 변신체라는 덩어리를 위생장갑 낀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이건 기름이 아니에요. 만져보세요. 부스러지잖아요. 그런데 누가 이걸 기름이라고 한 거예요? 설비 아저씨?"
다시 살얼음판... 4월 벚꽃이 어둠에 묻히니 찬서리가 내린다. 집안싸움(?)에 난감해진 설비업자들은 입을 다물고 묵묵히 기름덩어리만 건져 올렸다.
"흠... 그럼 국과수에 의뢰해봐야 하나요? 기름인지 아닌지... 성분분석을 의뢰합시다"
내 말에 슈퍼가 맞장구를 쳤다.
"그냥 요대로 놔두고 내일 날 밝으면 시청에 신고합시다. 그러면 시청에서 나와서 조사하고 만약에 폐유라면 영업정지를 주든지 과태료를 부과하든지 한다네요."
어둠이 진해지니 때마침 가로등이 켜졌다. 어둠에 묻혔던 각자의 표정이 밝은 어둠 속으로 드러났다.
"알았어요. 모든 비용을 제가 부담할게요. 그리고 기름은 안 부은 지 몇 달 됐지만 앞으로도 안 부을 거예요"
상황이 종료됐다.
T.S. 엘리엇에게 도대체 4월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잔인한 달이라고 시까지 쓰게 되었을까? 설마 이 망할 넘의 하수구 같은 일이 있었을까? 4월 어느 밤 우리 상가에서는 밤늦게까지 설비업자의 기름제거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수구에서 걷어낸 기름띠가 10여 년을 함께 해온 상가 사람들 사이사이로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