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10월 중순경.. 젊은 남자가 불쑥 들어와서 1억 선에 살 수 있는 농지를 구해달라고 했다. 몇 군데 수소문해보고 1억 5000선 농지가 있어서 연락했더니, 당일로 와서 보고 바로 계약했다. 토지계약이 참 쉽게 됐네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말했다.
"제가 20억 정도 융통이 가능해요.. 좋은 물건 찾아주시면 살게요.."
그에게는 유통업을 하여 큰돈을 만지는 형이 있었다.
자수성가한 형은 오로지 사업 확장에만 몰두하여 돈은 벌었지만,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만 성실하게 매달려 사느라 그 외 눈을 돌려 돈을 굴리는 등의 일에는 어두웠다. 그래서 평소 형을 잘 따르고 똘똘했던 막냇동생한테 ‘한번 굴려보라’고 한 것이다.
막내인 그는 항상 바쁜 형제자매들을 대신해 노부모를 봉양해온 효자였다. 한 배에서 난 형제자매들은 대체로 비슷한 성향을 타고나는데 그들 역시 노부모를 모시는 막내의 공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항상 살뜰히 챙겨주고 생활비도 보내주고, 심지어 노후까지 책임져주겠다는 약속을 했을 정도로 보기 드물게 우애 좋은 가족이었다. 그러다 노부모가 돌아가시자 홀로 남은 착한 동생에게 ‘믿고 맡길 테니 돈을 좀 굴려보라’ 한 것이다.
그때부터 매일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아파트도 몇 개 사고 상가나 오피스텔도 여러 개 샀다. 나름 큰돈을 굴리는 사람 치고 그는 겸손하고 꼼꼼하고 검소했다. 계약 직전이나 후에는 항상 바쁜 형님에게 상황을 꼼꼼히 설명했고 형의 일을 대리하는 대리인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형이 자수성가하며 먹을 거 못 먹고 입을 거 못 입고 힘들게 벌어 보내준 돈이니, 좋은 물건 잘 골라서 사야 한다고 살뜰히도 챙겼다. 자신을 믿고 투자금이며 생활비를 보내주던 큰 형님을 부모처럼 대했고, 싱글이라 혼자 지내서 입맛 없어도 돈 아끼려고 밥 한 끼도 안 사 먹고 주로 김치와 라면으로 때웠다.
그즈음 함께 어울리는 친구들이, 형의 부동산 재테크를 대신해주는 것이고 나름 많이 상승했으니 너무 곧이곧대로만 하지 말고 수고비조로 적당히 챙길 건 챙기라고 조언했다. 너무 바보같이 정직하게만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잔소리도 꽤 한 모양이다. 그러나 그는 단호했다.
“우린 그런 형제가 아니에요. 생활비도 보내주는 형이 얼마나 고마운데 제가 10원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되겠어요? 부모 같은 우리 형을 위해 저도 뭐라도 도움이 되게 최선을 다해야죠”
라고 결심처럼 말했다. 선량한 눈빛처럼 착한 마음을 보니 내 동생처럼 예뻤다. 다만 형님 일 봐주느라 직장도 그만두고 혼기도 놓치고 있는데 앞으로 괜찮을까 조금 우려가 되긴 했다.
그러다 6개월쯤 지나서는 얼굴도 안 보이고 뜸하길래 이젠 투자금이 없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전화하여 돈 좀 급히 보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막 신드롬이 일기 시작하던 비트코인에 손을 댔는데 초반이라 자고 일어나면 몇 배로 뛰던 때였다.
더 사고 싶은데 형이 새로 확장하는 영역에 잠시 돈이 묶여서 다시 빼려면 시간이 좀 걸리니 나한테 먼저 빌려달라고 했다. 단 며칠이라도 빌려주면 이자는 톡톡히 쳐 준다고 했다. 비트코인이고 뭐고 무지했던 나는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그러다 큰 일 난다고 잔소리만 했다.
그는 결국 담보대출을 받아서 코인에 집어넣었다. 오피스텔이고 상가고 그동안 사두었던 담보물마다 받을 수 있는 대로 대출을 뽑아냈다. 코인으로 돈 많이 벌었으면 이제는 그만 하라고 진심 어린 잔소리를 했더니
"제가 부동산에 투자 안 하고 코인만 하니까 섭섭하시구나?"
라고 했다. 아무튼 코인 붐 초기라 돈을 많이 벌어서 고급차도 뽑고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나한테 바보라고 자기가 하란대로 했으면 돈 수억 벌었을 거라고 놀렸는데, 얼마 안가 비트코인 폭락 소식이 들려왔다. 걱정돼서 물었더니 본인은 하락 직전에 빠졌다고 했다. 아유 역시 똑똑해 다행이다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다.
어느 날 톡이 왔다. 예전에 사들인 오피스텔과 토지 계약서 좀 카피해줄 수 있느냐 물어서, 등기권리증에 계약서 다 첨부돼 있을 텐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즉시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들과 크게 싸우고 짐을 챙겨 잠적한 지 한 달이 되었단다. 나한테 말한 것과 달리 코인에 계속 투자했던 모양인데 한때 수십억을 벌어서 형제자매들이 구름을 타고 다니는 기분이었다가 어느 날 폭락하자 10%도 안 남은 본전을 서로 챙기느라고 싸움이 났다. 물거품처럼 사라진 돈에 눈이 뒤집힌 형제들이 손실의 책임을 그에게 돌리는가 하면, 심지어 그동안 따로 수익금을 빼돌리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꼬리를 물어 구타 등등... 결국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다고 한다.
싸우지 마라 고지식하게 사업에만 몰두해온 형의 마음을 이해해라... 나쁜 생각 말고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녀라 아직 젊으니까 좋은 날이 다시 올 거라고 한참을 다독였는데, 혹시나 나쁜 생각을 할까 걱정되었다.
3~4년 전만 해도 큰 형님과 가족들에 대한 경외심과 고마움이 온몸에 우러났었다. 참 보기 좋은 형제들이구나 했는데, 자고 나면 치솟던 비트코인의 환상적인 맛을 본 죄로, 그래서 눈이 휘둥그레지는 수익을 거머쥔 뒤로 그 선량하고 우애 좋던 가족이 몇 년 만에 피폐해져 버린 것이다.
오히려 부모같이 사랑하는 형님의 돈을 좀 더 크게 잘 굴려주고 싶다는 선한 욕심이 없었다면 그들의 우애는 지속되지 않았을까...
“우린 이제 가족이 아니에요. 다시 돌아갈 수 없어요. 용서할 수도 없어요”
로또가 당첨돼서 돈벼락 맞기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 돈이 많아지면 지금보다 더 많이 행복해질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또 당첨자의 파산확률은 3분의 1에 이른다고 한다. 로또에 당첨되기 이전보다 행복해진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고 한다. 뜻하지 않은 대박이 인생 쪽박으로 이어진다는 말도 그래서 나왔다.
비트코인 이야기는 이 형제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몇 년 전에는 가까운 지인도 주변 친구들의 돈까지 빌려 코인에 투자했다가 하락하는 바람에 집까지 처분하여 채무를 청산하기도 했다. 그들의 ‘실패’를 보고 아~안 하길 정말 잘했다! 안도했는데, 바닥으로 추락한 줄 알았던 가상화폐가 다시 급상승하여 코인으로 큰돈을 벌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들려오니 다시 배가 아파졌다.
“2000 투자했다가 20억 벌어서 건물 샀대~~”
아 부럽다. 그들이 똑똑하고 발 빠르게 투자하고 있을 때 도대체 난 뭘 한 거야.
중개업에 종사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본다. 부동산으로 벼락부자가 되거나 혹은 벼락거지가 되는 사람들도 보고, 주식으로 평생 못 만질 수익을 거머쥐어서 사표를 쓰고 나온 사람들도 보고, 반대로 가상화폐로 철천지 원수가 되어 뿔뿔이 흩어진 가족도 보고, 20억 건물을 산 사람도 보았다. 그들에 비하면 내 인생은 참 따분하고 무미건조하다.
그러나 수익률이 높으면 리스크도 높다는 것은 변함없는 진리다. 리스크 중에는 미리 알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불가항력적으로 맞닥뜨려야 하는 것도 있다. 불가항력적인 리스크는 운에 맡겨야 한다. 그래서 종잡을 수 없는 거대한 실패에 맞닥뜨려도 삶이 영향받지 않을 만한 배짱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 한번 돈 맛을 보면 쉽게 빠져나오지 못하고 인생 전체를 운에 맡기며 등락폭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종속적인 삶의 길을 걷게 된다.
나는 내 인생을 운에 맡겨둘 만큼 통이 크지 않아서, 그냥 덜 먹고 덜 싸고 고지식하게 사는 쪽을 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