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빼고 보니 동네 할아버지 한 분이 핑크색 가방 두 개를 어깨에 둘러매고 세상 지친 표정으로 들어섰다. 그전에 먼저 쏜살같이 들어온 건 어린 손녀 두 명.
"나 좀 잠깐만 쉬었다 갈게"
어딘가에서 막노동이라도 하고 온 듯 너무나 지친 표정, 할아버지의 푸념이 이어진다.
새끼덜 징그랍게도 말도 안 들은디 지에미 애비는 일한다고 나한테 맡겨놓고 .. 내가 저것들 때미 더 빨리 늙어. 마누라는 갈수록 가는 귀가 먹어서 뭔 말을 해도 못 알아묵은께 모다 다 내일이여. 아이구 징그러 아이구 징그러
해맑게 까르르 대는 손녀들을 옆에 두고도 얼마나 힘드셨는지 신세한탄이 이어진다.
내가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고 평생을 죽도록 일만 하다 이제 동네 노인정 다니면서 편하게 놀 나이에 애보기나 하고 있어. 친구들이 놀러가자고 해도 내가 저것들 때문에 아무 데도 못가. 내가 이 나이에 왕따가 되게 생겼어.
그 틈에도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아랑곳없이 뛰어다니던 손녀 하나가 할아버지의 쭉 뻗은 발에 걸려 털썩 넘어진다. 으앙~ 대번 노려보는 호랑이 할아버지.
"시끄러. 남의 사무실에서 왜 울어. 그러게 좀 가만히 앉아있지 할아버지 쉬는 꼴을 못 봐요, "
호되게 나무라니 얼결에 울음을 그치고 삐죽삐죽 대는 손녀들
"아이구 이것들이 또 밤에 즈그 엄마 오면 단박에 일러요. 할아버지가 혼냈다고. 애 보믄서 말 안 들으면 혼낼 수도 있지. 그럼 애들 말만 믿고 며느리 콧김에서 찬바람이 날려. 내가 이 나이에 그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해? "
평소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밀크 커피를 타서 갖다 드렸더니, 그 뜨거운 걸 단숨에 들이키다 캑캑거리신다. 삐죽대며 눈치 보던 손녀들이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긴 듯 자지러지게 웃는다. 다시 손녀들을 곁눈으로 흘겨보는 할아버지.
"뭘 웃어 새끼들아. 할아버지가 캑캑거리니까 좋냐?
우리 집 얼마 받을 수 있어? 빨리 팔아버려~ 집 팔고 이것들 멀어서 못 오는 데로 이사 갈 거야.
이거 팔고 아주 먼 곳에다 방 한 개뿐인 집 사줘. 이것들 좁아서 못 오게."
한두 번 들은 이야기가 아닌지 손녀들은 이내 아랑곳 않고 할아버지를 사이에 두고 양쪽에 붙어서 서로 숨바꼭질을 해댄다. 아이고 70 넘어서 기운 넘치는 손녀들 보시려니 힘들긴 힘드시겠다. 얼마나 힘드셨으면 이쁜 손녀들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대놓고 투덜대며 한탄을 하실까..
"얼른 팔아버려. 조용히 팔고 짐 싸서 가버려야지. 애 키운 공이 없다고, 하루 종일 저것들 뒷바라지해도 아들놈은 애들 좀 잘 보라고 잔소리뿐여. 비 오는 날 아무리 나가지 말라고 해도 발 달린 것들이 지발로 기어나가서 놀이터에서 비 맞고 놀다가 감기 걸린 것이 왜 내 탓이여? 나도 지쳐서 tv 보다가 잠깐 잠들었을 땐데. 지 에미 귀가 안 들려서 보청기 해주는 건 몇 달이고 끌던 놈들이 애들이 콧물 한 방울만 흘려도 아주 난리를 쳐."
할아버지가 뭐라 하건 말건 양쪽에 붙어서 고개를 넣다 뺐다 하다가 그만 할아버지한테 등짝을 한 대씩 스매싱 당한 이쁜 손녀들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듯 다시 삐죽삐죽 댄다.
아이고 총제적 난국이네.
손녀들한테 가서 그중 더 어려 보이는 아이의 손을 맞잡고
나 : 엄마 아빠가 좋아? 할아버지가 좋아? 손녀: (무슨 말도 안 되는 질문이냐는 표정) 나 : (큰소리로) 뭐? 할아버지? 에이~ 무슨 할아버지가 더 좋아~
벽에 기대어 몸을 모로 꼬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있던 할아버지의 눈이 갑자기 화등잔만 해지더니?
"진짜? 진짜? 아녀~ 저것들 나 안 좋아해."
하고 고개를 세차게 도리도리 흔드신다. 그래서 이번에는 할아버지한테 손녀 모습이 안 보이도록 몸으로 아이를 쓰윽 가리고 다시
나: 진짜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 손녀: ( 어이없다는 표정. 그러다 고개를 좌우로 흔들려고 하길래 아이 머리를 빡 잡고) 나: 어머? 진짜야? 할아버지가 최고야? 그렇게 좋아~~? (아이가 뭐라고 말을 하려 하길래 손가락으로 쉿! 표시를 한 후 윙크해주고 ) 그렇게 좋아?
할아버지 눈이 더 커지더니 몸을 앞으로 쑥 내밀면서
뭐래~ 허허허.. 싫어헐텐디 허허 나 안 좋아하는 것 같은디 뽀뽀도 지 애미에비한테만 해주고 허허 하더니 문쪽에 멀뚱히 서 있는 또 다른 손녀를 가리키며
"쟤한테도 물어봐 쟤는 아닐 거야 쟤는 전에 할아버지 싫댔어"
그러시길래 다시 문쪽으로 가서 할아버지가 아이 얼굴을 못 보게 막고
나: 넌 엄마 아빠가 좋아? 할아버지가 좋아?
한 뒤에 얘가 대답하기도 전에
"너도 할아버지라고? 아이구 할아버지를 바로 가리키네요~ 야~~ 이렇게 할아버지밖에 모르는 애들 또 첨보네~~ 히야 ~ 애들이 할아버지가 얼마나 사랑으로 돌봐주시는지 다 아나보네. 누구 닮았는지 똑똑하네요~ "
라고 호들갑을 떨었더니 아이도 어이없는지 웃고 할아버지는 좋아서 코를 벌름벌름~~
우리 집 종자가 좀 똑똑하기는 해. 나도 저만할 때 똑똑하다는 소리 겁나게 들었어.
그러시더니 양손에 손녀들 손잡고 아이스크림 사준다고 방실방실 웃으며 나가신다. 들어올 때랑 360도 다른 모습.
단순하기는 70대 할아버지나 대여섯 살 손녀나~~
아니다 모든 사람은 단순하다. 단순하니 당연한 말도 다시 듣고 싶고 확인하고 싶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한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가치가 없다. 거짓말이라도 좋다. 서로를 위해 애쓰고 있는 가족과 이웃들에게 이왕이면 듣기 좋은 목소리로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윙크 날리면서 살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