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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04. 2021

엘리베이터에서 세입자를 만났을 때

매매 잔금 일.


전세 임차인이 살고 있는 상태로 집을 파는 것이었다. 임차인은 70대 노부부로 8년 전에 들어와 여러차례 연장하여 살고 있었다.


잔금이 끝나갈 무렵 매도인 심여사가 말했다.



"아유  이제 엘리베이터 편하게 타겠네."



심여사는  5층인 이 집을 6년 전에 샀다.  그때도 70대 노부부가 전세로 살고 있었는데 만기가 몇 개월 안 남아서,  심여사는 그들을  내보내고 입주할 예정으로 매입했다.



"내가 갭투자 하는 사람도 아니고 당연히 이사 들어올 생각으로 계약했지.  당시 집주인도 세입자가 만기가 다 되어가니 내보내는 조건으로 판거고,,. 그런데 말야 중간에 내가 다시 한번 집을 둘러보러 간 게 문제였어."



가구 배치 좀 구상할 겸 집을 둘러보러 갔는데 임차인 할머니가 쑥스러운 듯 말하더란다.



 "아유 이 나이에 남의 집 더부살이하고 있으니 좀 그러네요.  원래 우리두 집 있었어요. 우리 집. 그런데 집 팔아서 아들이 사업자금으로 쓰는 바람에 졸지에 남의 집 살이 하게 됐어. 다 늙어서 말이유. 나이 먹을수록 언제 죽을지 모르니 자기 집 차지하고 살아야 하는데.. 휴... 집이 팔리면 또 어디로 가야 하나"



심여사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집이 팔리면 유랑하듯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는 노부부. 그녀는 노부부를 내보내고 입주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같은 동 12층을 사서 입주하였다. 그렇게 하여 졸지에 임차인과 임대인이 같은 아파트 같은 동 같은 라인 5층과 12층에 살게 된 것이다.



"이사해서 어느 날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세입자 할머니 할아버지가 타고 계시는 거예요. 나도 모르게 인사를 했어. 우리 세입자니까 남 같지 않게 반가웠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녀가 누구인지 기억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 매매 후 전세 재계약서 작성 시에도 아들이 와서 처리하다 보니 할머니 할아버지를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노부부는  가물가물한 듯 누구더라... 어디서 봤드라 하며 갸우뚱갸우뚱 기억해내려고 애를 쓰는 표정이었다.


순간 심여사는 기억도 못하시는데 굳이 '내가 바로 당신네 집주인이다.'라고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낯익은 얼굴에 대한 기대감이 부담감으로 바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유 잘됐다. 하고 '12층에 새로 이사 왔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했지 뭐"


"아니 왜요?  할머니가 어디서 본듯하다고 하시면 그냥  그때 집 보러 갔던 사람이다. 내가 그 집을 산 집주인이라고 말하시면 되죠.  당신들 계속 살게 하려고 다른 집으로 이사 왔다고 하면 고마워하고 더 반가워하셨을 텐데?"



그러자 심여사가 정색하며 말했다.



"무슨 소리예요. 그 연세이신 분들은 요즘 젊은 사람들과 달라. 남의 집 사는 게 부끄럽고 기죽을 일이거든.  요즘에야 돈이 있든 없든 계획에 따라 전세도 살고 월세도 살지만  우리 부모님 세대는 집이 있고 없고,  남의 집에 살고 내 집에 살고가 살아온 인생의 어떤 잣대 같은 것이에요.  어르신들 그  자존심을 내가 건드리고 싶지 않았어."



어쨌든 심여사는 배려하는 마음으로 집주인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한 라인에 살다 보니 엘리베이터에서 부딪힐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는 혹시나 기억이 소환될까 싶어 고개를 모로 꼬거나 죄지은 사람처럼 한쪽으로 피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4년째 되는 날 임차인 아들이  다시 연장 계약을 하고 싶다고 연락해 왔다. 심여사가 부동산에 전세시세를 알아보니 인근 신도시 입주물량이 많아서 시세가 조금 내렸다는 소리를 듣고, 임차인 아들에게 계좌번호를 물어 전세보증금 일부를 반환해 주었다고 한다.



"보증금이 감액되었으면 전세계약서는 감액된 걸로 다시 쓰셔야지 왜 안 쓰신 거예요?"



보통 전세보증금의 증액이나 감액이 없이 변동되지 않으면 계약서를 새로 쓸 필요가 없지만, 금액의 증감이 있으면 계약서를 새로 작성하는 게 원칙이다. 보증금을 감액해주었으면 임대인 입장에서는 감액된 금액으로 내려서 쓰고 싶은 것이고,  보증금이 증액되었다면 임차인 입장에서는 인상된 보증금만큼 보호받기 위해서 계약서 재작성을 요청하는 게 일반적이다. 아예 기존 계약서를 폐기하고 새로 작성하지는 않더라도 기존 계약서에  금액의 변동사항을 명시해 놓기라도 한다.


그러나 심여사는 계약서를 다시 쓰자고 하면 계약자인 아들뿐 아니라 노부부가 함께 와서  본인이 집주인인 걸 알게 될 수도 있고, 노부부가 계약 시 동참하지 않더라도 재계약서에 임대인의 주소가 같은 동 12층으로 표기되면 혹시나 집주인이 같은 층에 산다는 걸 알게 될까 봐 차일피일 미루다가 쓰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임대보증금 일부 반환한 내용을 문자메시지로만 공유한 상태였다.


 심여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 같으면 상대방 상황이나 기분보다는, 돈이 오간 일이니 확실한 게 좋다며 당장 불러서 계약서를 새로 썼을 텐데...


그리고 또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임대인과 임차인이 만나면 많이 불편할까? 임대인은 무슨 생각이 들고 임차인은 무슨 생각이 들까.  하긴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수시로 마주치게 된다면 또 다르기도 하겠다. 특히나 계약기간 2년은  금방 지나가는데,,,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제 이사 나가라' 하거나 '월세로 바꾸겠다' 하거나 '보증금을 왕창 올려달라'는 말을 할까 봐 쭈뼛거려질 수도 있겠다.



"연세 드신 분들은 내가 집주인이다 내가 세 사는 사람이다 이게 기분이 완전 달라. 그러니 그 어르신들이 내가 꼴랑 집주인이라고 하면서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면 얼마나 불편하고 또 기분이 그러시겠어. 나라도 내가 남의 집에 세 사는데 주인이 같은 동 같은 라인에 살아서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면 왠지 불편했을 것 같아. 그래서 되도록 안 마주치려고 노력했어."



그동안 나름 정형화된 임대인 임차인을 보아온 나로서는 '뭘 그렇게까지'라는 생각이 쉽게 떨쳐지진 않았다. 누구나 임대인도 될 수 있고, 임차인도 될 수 있는 것이니  각자의 의무와 권리만 잘 이행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잔금을 마치고 일어서면서 매도인 심여사가 매수인에게 말했다.



"우리 집 세입자, 아니지 이제 우리 집이 아니지. 5층 사시는 할머니 할아버지 되도록 오래오래 그 집에 살게 해 주세요.  집 파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그것 좀 오지랖 넓게 부탁드리고 싶네요"



 매수인은 알았다며 웃었다. 매수인의 흔쾌한 반응에 심여사는 마음이 좀 편해졌는지



"아유 죄진 것도 없는데 그동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면 괜히 죄스러웠어요. 이젠 집 팔아버렸으니 안 피해 다녀도 되고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도  왠지 당당할 것 같으네. 이게 집 가진 죄야 죄! 하하하"



라며 한바탕 웃고 갔다.



그동안 좀 까칠해 보였던 심 여사님, 오늘 보니 참 멋진 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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