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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02. 2021

라면이 떨어졌어요.

마약 같은 빌라 아저씨

    

점심식사 후 다소 나른하던 어느 오후에 웬 남자가 전화를 했다.


본가가 부동산 사무실 주변 마을이라 왔다 갔다 하며 나를 자주 봤다고 친한 척을 했다. 본인은 현재 이 동네에서 차로 30분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의 외진 빌라촌에 살고 있다며 그 빌라를 팔아달라는 것이었다.


지번을 받아서 위치를 살펴보니 언젠가 임야 매물이 접수되어 임장활동을 갈 때 지나친 적이 있는 마을이었다. 거리가 상당하지만, 그래도 본가에 가까운 중개사무소라 반가웠나 싶어서 감사히 접수했다.


외진 마을 오래된 빌라를 팔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물건 장부에 올려놓고 나름 광고도 했는데 역시나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그는 집 보러 오는 사람 없냐고 묻더니 갑자기 처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일하다 다쳐가지고 치료받느라 일을 오래 못해서 쌀도 떨어지고.. 라면 하나 살 돈도 없고..."


아... 저런


"그래서 얼른 집을 팔아서 병원비도 하고 생활비로 써야 해요"


라고 말했다. 듣는 순간 조금 난감해졌다. 마음도 아팠다.


아유... 일도 못하시고 치료비도... 안되셨네..


뭐라고 위로의 말을 전해야 하나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다시 말했다.


"며칠 전에 라면도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라면도 떨어져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아유 어떡해... 전화를 끊고 나서도 마음이 심란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의 한마디는, 가슴을 뚫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하고 머무는 중독성이 있었다.


나는 점심을 배 터지게 먹어서 졸린 참인데....

하.. 잘 팔리지도 않는 시골 마을 외진 빌라를 언제 팔아서 언제 라면을 사 먹냐고... 참...


고심 끝에 컵라면 두 박스를 사서 빌라 동네로 갔다.

'컵라면을 사왔는데 다쳐서 나오기 불편하실테니 집으로 가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괜찮다며 그가 빌라 입구로 나왔다. 60대 후반쯤 보이는 남자분인데 많이 다치진 않았는지 겉보기엔 괜찮았다.


나는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아 민망했지만 라면 박스를 건네주었다.


"일단 라면이라도 드세요. 광고 내서  빨리 팔아볼 테니 너무 걱정 마세요"


하고 돌아왔다.


또 광고를 했지만 여전히 빌라를 보겠다는 손님은 없었다. 하긴 그 동네 빌라를 찾는 손님은 그 동네 부동산으로 갔겠지... 부동산 공동망으로 검색해보았으니 그쪽 동네에는 내놓지 않았는지 같은 층 유사한 가격대 매물은 없었다.

 

2주쯤 지나서 그가 또 전화를 했다.


“집 보러 오는 사람 없나요? 컵라면도 다 떨어지고.. 라면만 먹으니 얼굴도 누렇게 뜨고 붓고..”


라면만 먹으니 얼굴도 누렇게 뜨고 붓고...


하... 다쳐서 편찮으신 분이 진짜 내가 준 라면만으로 끼니를 이어가고 계신 건가? 휴


쌀 20kg를 사서 빌라로 가져다주었다. 그는 지난번 방문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 같이 간 소속 공인중개사가  '블로그에 사진을 올리면 좀 더 빨리 팔릴 수 있으니 내부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느냐'라고 묻자, 그는 거절했다.


"다음에 찍으세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정리를 못했거든요."

  

그러던 중 빌라 인근에 위치한 중개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동네 주민이 그 빌라를 찾는데, 확실히 매매 가능하냐고 물었다  꼭 사실 분이니 언제 집 볼 수 있는지도 알아봐 달라고 했다. 재차 확인하면서 중개사가 말했다.


"아니 이 동네 물건을 왜 거기에다 내놓았을까요? 잘 아는 분이신가요?"


뭐. 잘 안다기보다는....


아무튼 너무 잘 됐다~ 

드디어 빌라 아저씨가  집을 팔고 쌀을 사서 밥도 해 먹고 라면도 끓여 먹을 수 있게 되었구나..


나는 너무 좋은 마음에 신이 나서 전화를 했다. 집 볼 사람 있다고 집 좀 보여달라고 했더니..

좋아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머뭇머뭇하더니 잠깐 보류해야겠다고 했다.     

어? 바로 며칠 전까지도 빨리 팔아달라더니?     


빌라 아저씨는 이 집 팔면 딱히 이사 갈 데가 없다고 고민 좀 다시 해봐야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요, 쌀이 다 떨어졌어요. 물론 컵라면도 없고요.”


쌀이 다 떨어졌어요. 물론 컵라면도 없고요...

아니 내가 사회복지사도 아니고....


동네 중개사한테 상황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가 물었다.


"아 혹시 203호인가요? 라면 떨어졌다는 아저씨?


라면 떨어졌다는 아저씨?


그걸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순진하시네요...




며칠 후 주말

가족들과 함께 쇼핑을 갔는데,  맞은편에서 웬 여자의 팔짱을 낀 채 쇼핑백을 들고 활기차게 걸어오는 남자를 보았다. 낯이 익어서 얼떨결에 인사하고 지나쳐가다 갑자기 빌라 아저씨가 생각났다. 돌아보니 횡단보도를 넘어선 그도 멈춰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아~ 마약 같은 빌라 아저씨..     


그 후로는 쌀이 떨어졌다는 전화도 컵라면이 떨어졌다는 전화도 안 왔다. 아니 아직도 그 빌라에 사는지 어떤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그는 본가에 오가느라 나를 자주 보았다는데 나는 그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본가에 올 때 한 번쯤 들를 법도 한데 그는 한 번도 들른 적이 없다.

정말 그의 본가가 내 사무실 주변 동네가 맞을까..


그러나 이제 와서

본가가 이 동네인들 어떠리 동네인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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