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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Aug 12. 2021

그가 말했다  "너도 참 안됐구나!"


너도 참 안됐구나!


퇴근해서 언제나처럼 설거지를 하고 세탁기를 돌린 후 마른빨래를 걷어와 정리하는 참이었다.  9시가 넘은 시간이라 마음이 바빴다.  하.. 아들 녀석이 제대한 뒤론 날마다 빨랫감이 수북하다.  사람 하나 늘었다고 모든 일거리가 배가 됐다.

얼른 해치울 요량으로 똥손을 돌리는 귓전에 남편의 목소리가 스쳐갔다.


"너도 참 안됐구나!"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는 남편을 등진채 빨랫감을 하나하나 개키던 참이니 남편이 TV 속 누군가를 보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누가?  왜?"


나는 고개도 안 돌린 채 영혼 없는 대꾸를 했다. 남편이 오래간만에 뭐라고 했는데 응수는 해줘야지 하는 예의지범에서 나온 말이었다.


"너 말이야. 너. 너 안됐다고"


뭔 소리야. 그제야 나는 고개를 돌려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는  언제나처럼 거실 소파에 세상 편한 자세로 기대어 있었다. 평소와 다른 거라면 두 눈이 TV를 향하지 않고 나를 향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눈빛이 그에게서 한 번도 발견하지 못한 뜻 모를 빛깔을 띠고 있다는 것.


나는 피곤에 지친 눈을 치뜨며 물었다. 뭔 소리야? 무슨 일 있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저녁 식사 준비해놓고,, 옷 갈아 입고 출근하고. 출근해서 종일 이 손님 저 손님 상대하고 일하다가 저녁 8시경 퇴근해서 설거지하고 정리하고 빨래하고 잠자리에 들고...  너는 무슨 재미로 사니?"


너는 무슨 재미로 사니?



헐.... 이게 남편이 아내한테 할 말인가?


남편이 갑자기 내 일상으로 훅 들어왔다. 듣고 보니 내 인생이 좀 이상해 보였다.


결혼 23년 차. 나는 습관처럼 집안일과 바깥일을 반복하고 있다. 더구나 요즘 젊은 남편들과 달리  내 남편은 집안일은 당연히 아내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퇴근하면 이미 준비해놓은 (내가 아침 출근 전에 만들어놓은) 식사를 하고 그대로 설거지 통에 담가놓은 뒤 TV를 보거나 운동을 하거나 개인만의 휴식을 갖는다. 그에게 집은 완벽한 휴식공간이고 나에겐 또 다른 노동 현장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사무실에서의  바쁜 업무가 끝남과 동시에 시작되는 새로운 업무. 퇴근길에 차창으로 지나치는 각종 마트와 반찬가게를 스캔하며 다음날 식단을 짜기도 하고, 마땅한 반찬거리가 없으면  바로 내려서 장을 보기도 한다.  어느 날은 남편이 회식하고 온다는 소리가 반갑기도 하다. 세탁소에 옷 맡기기 찾기 그리고 세탁기 돌리기 널기 등등


이런 일들은 새로운 일도 새삼스러운 일들도 아니다.  그냥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다. 누구 말대로 안 하면 표가 나는 일이지만, 열심히 해도 표가 안나는 일이다. 그런데 남편은 왜 갑자기 그동안 너무나 당연한 듯 해온 일들이 새삼 안쓰럽게 보였을까?


"넌 무슨 재미로 사니? 그렇게 하루 종일 사무실에서 일하고 집에서도  일하다가 하루를 끝내고 다음날 똑같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괜찮니? 재미는 있니?"


재미는 있니?


남편은 뜻밖에도 진지했다. 왜 그는 당연한 관념을 뚫고 물음표를 던진 것일까? 그즈음 새삼스러운 것이라고는 올여름이 유난히 덥다는 것과 도쿄 올림픽이 한창이었다는 것뿐. 남편에게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은 없었다.


나는 짐짓 물었다.


"자기는? 자기는 어떤데.. 자기도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와서 피곤하잖아. 뭐 달라?"


"나는 집에서는 쉬잖아. 그런데 너는 집에서도 계속 뭘 하잖아."


"아니 계속 그래 왔잖아. 그런데 23년 차에 그게  왜 갑자기 눈에 보였냐고.  무슨 일이 있어?"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진짜 더위를 먹은 것인지도 모른다.


지금은 포기했지만 나라고 불만이 없었겠는가. 살면서 한 두 번 정도는 힘들다 소리를 한 것 같다. 물론 변화가 생기지 못할 만큼 가볍게...  간혹 남편이 반찬투정을 하면 '아.. 나도 힘들어. 요리를 못하는데 어떡해. 사무실 문 닫고 요리 배우러 가? 시간 많은 자기가 요리를 배워서 직접 해 먹든지.." 정도로


그럴 때마다 이어지는 남편의 레퍼토리는 참 식상하기도 했다. '요새 사무실 얼마나 스트레스 많은지 알아?  집에서라도 좀 편히 쉬어야지"


남편은 항상 집에 오면 쉬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 나는 꼼짝을 못 했다. 그래 쉬어라..


익숙해진다는 건 참 무서운 일이다. 옳고 그르고를 떠난다. 그냥 해오던 대로 무의식적으로 하게 된다. 그러니 어떤 일이고 쉽게 익숙해질 일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내 일상에 익숙해져  살았을 뿐이다. 가사분담이니 여권 신장이니 하는 건 남의 일이고 밖에서는 일 잘하는 '똑순이' 소리를 들어도 집에서는 그저 가사 독박 아내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역전의 기회가  온 것일까? 굼벵이도 꿈틀 할 기회가 온 것일까? 나는 이 기회를 어떻게 찬스로 바꿀지 잔머리를 좀 굴러보려 했는데  잘 되지 않았다.


"그렇지? 내가 좀 안됐지?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럼 이제부터 땅콩 까먹을 때 껍질 가루 좀 날리지 않게 먹어. 껍질 없는 땅콩을 먹든지 아님 땅콩 먹은 후에는 언저리를 물휴지로 깨끗이 좀 닦아."


고작 땅콩이라니... 하긴 남편이 간식으로 먹는 땅콩 껍질 가루가 여기저기 눈에 띄어 신경을 거스르던 참이었다. 그래도 고작 땅콩이라니... 문제는 역시 나에게 있다. 무슨 문제냐면 문제의식이 없다는 문제...


"아후 또 잔소리.."


대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하긴 부부간에 미묘한 대화가 오가기는 쉽지 않다. 새삼스럽게 고생하네 덕분이네 이런 거 익숙하지 않지. 오글거리잖아... 그는 도쿄 올림픽에 빠져들었고 나는 빨랫감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음식물 쓰레기를 봉투에 담자마자 남편이 불쑥 다가와 위생장갑을 꼈다.


"뭐야?"


"밖에 좀 나갔다 올 건데 나가는 김에 음식물쓰레기 좀 버리고 오려고"


그는 냄새와 폼새에 민감한 50대 남성이다. 음식물쓰레기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쓰레기 처리장으로 가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또 길들여진 내 관념에서도 '남자가 음식물 쓰레기를 들고나가는 것'은 꼴이 아니었다.


그런데 나가는 김에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겠다니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  그는 양손에 위생장갑을 두장씩 포개어 끼고는 음식물쓰레기를 겹겹이 포장해서 오만상을 찌푸리며 나갔다.  하... 손바닥만 한 음식물 버리는데 위생장갑 4짝에다 비닐봉지 2장..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  '나가는 김에' 음식물을 버리겠다던 그는 곧장 들어왔다.


다음날도 다음 날도 그는 내가 설거지 마치기를 기다려 양손에 위생장갑 두장씩을 포개어 낀 뒤에 음식물을 채갔다.  


뿐만 아니라 과일을 깎아먹거나 군고구마를 먹고 난 뒤에 껍질이 쌓이면 어김없이 위생장갑을 찾아 끼었다. "너 참 안됐구나" 이후로 남편은 갑자기 안돼 보이는 아내를 위해서 음식물 쓰레기 처리를 담당하기로 결정한 듯했다. 다른 여러 가사 업무 중 시간이 많이 들고 번거로운 일을 빼고, 여태 본인이 가장 꺼리고 꿈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음식물쓰레기 버리는 것'이 가장 합당한

가사분담이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2021년 8월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남편의 눈에 참 안돼 보이는 여자가 되었다. 그런 말을 들으니 가끔 심심할 때마다 내가 불쌍해지기도 한다. 불쌍한 아내를 위한 봉사로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를 선택한 그의 어쭙잖은 행동이 뭔가 불편하긴 하지만 모른  해보려 한다.


세상은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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