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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콩 Oct 11. 2021

블랙박스는 알고 있다.

구불구불 우회하던 출근길에 도로가 뚫렸다. 출퇴근 시간이 15분 정도 단축되었다.

새 길을 다니기 시작한 며칠간은 꼬박꼬박 신호를 잘 지켰다.


어느 순간 다른 차들이 그냥 막 통과하는 게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통행이 뜸한 길이라 아직은 괜찮구나...' 


나도 그냥 통과하기 시작했다.  혼자만 신호 지킨다고 멈춰 있는 것이 왠지 융통성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는 항상 이렇게 안일한 사고에서 비롯된다. 


어느 날 아침, 보통 때처럼 음악을 들으며 흥얼흥얼 달리던 중 수십 미터 앞 교차로의 초록불이 빨간색으로 바뀌는 것이 보였다. 달리면서도, 어쩌지? 멈출까? 그냥 갈까? 고민하는 사이 건너편 차가 그냥 쓰윽 지나오는 게 보였다.


내 갈등도 쓰윽 지나갔다.


막  교차로를 넘는 사이 우측에서 달려드는 트럭..... 순간


'나는 이제 죽었구나...'


그리고 충돌했다.




에어백이 두 개나 터졌고 차는 반파됐다. 다행히 나는 솜털 하나도 다치지 않았다. 상대 차량은 1톤 트럭이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내려서 오히려 나에게  괜찮냐고 물으셨다. 나는 문을 열고 죄송합니다 라고 인사했다. 내 잘못이니까... 내가 신호를 무시하고 그냥 지나쳤으니까..


외관상으로는 내 차의 파손 정도가 커서 다들 나에게 큰 참변이 난 것으로 오인할 정도였고, 지나가던 차량이 신고하여 경찰차와 앰뷸런스도 출동했다.


사람들이 어찌 된 일이냐고 묻자, 1톤 트럭 할아버지가 말했다.


"아이고 내가 멈췄어야 하는데, 막 진입하는 순간 신호등이 바뀌더라고 에구..."


그러자 보험회사 직원이 나를 한쪽으로 불렀다.


 "상대 차량 할아버지가  신호 바뀔 때 들어오셨다고 하니 사모님은 그냥 가만히 계셔요".


그런데 막상 경찰이 신호위반을 인정하겠느냐고 묻자 할아버지는


"그건 아니죠~"


라고 답했고, 경찰 조사가  시작되었다.

경찰관은 내 차의 블랙박스를 떼서 경찰서로 들어오라고 했다.


사무실에 와서 블랙박스를 틀어보니, 내가 교차로에 진입할 당시 분명히 빨간 불이긴 했는데 깜빡거렸다. 나는 깜빡거리는 건 블랙박스 상의 문제일 거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냥 신호위반을 인정하겠다고 하자  보험회사 직원은  '상대차도 신호위반을 한 것 같으니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말라'고 만류했다.


경찰서에 가니, 경찰관은 '할아버지는 입원하셨다'며 나를 가해자로 몰아붙였다. 상대 차량에는 블랙박스가 없으니 현장 상황을 오로지 내 블랙박스로만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게 나의 신호 위반을 확인시켜주어 내가 가해자라는  단서가 되었다.  


나는 6차선 대로를 주행 중이었고 상대 차량은 2차선 소로이니, 내 차의 블랙박스가 없었다면 상대 운전수가 여러 사람 앞에서 '신호등이 바뀔 때 멈추지 못했다.'라고 한 진술에 의존해 상황이 반전될 수도 있었다.   


며칠 후 나의 과실로 종결되어 검찰로 넘겨졌다. 나는 '찔리는 게 있어서' 겸허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외려 보험회사 직원이 펄펄 뛰었다.


"사모님이 가해자가 아니에요.  블랙박스를 자세히 보세요. 사고 난 순간 차가 살짝 들리면서 신호등을 보여주는데 그때 사모님 방향 신호등은 이미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어요.  그다음 차가 충돌 여파로  좌측으로 반 바퀴 틀어지는데 그때 상대 차량 진행방향 신호등이 찍혔고 빨간불이에요..."


어머나.... 나는 사고 순간이 너무 무서워 블랙박스를 자세히 살펴보지 못했었다. 그러나 보험회사 직원의 말을 듣고 다시 영상을 확인해보니.....


충돌 순간에? 혹은 내가 신호등에 진입한 순간에 신호가 바뀐 듯했다.

1초만 늦었더라도...


상황은 반전되었다.


경찰서에 항의했다. 왜 블랙박스를 끝까지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나를 가해자로 모느냐.... 경찰은 블랙박스를 재확인한 후 나에게 사과했다.


검찰로 넘어갔던 서류가 쌍방 신호위반으로 수정됐다. 그런데 후에 전자민원을 떼보니 내 진행방향은 6차선이고 상대 차선은  2차선 소로였는데 양쪽 다 4차선인 것으로 묘사돼 있었다. 나는 보험회사 직원의 조언을 듣고 경찰서에 항의했다. 다시 수정되었다..


그리고  1년여의 소송 (보험회사들끼리) 끝에  7:3으로 상대편 차의 과실이 큰 것으로 판결 났다. 사고 난 순간과 직후까지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처음엔 나를 옭아매는 것 같던 블랙박스가 종국에는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판결 결과와 상관없이 상대편 차량 할아버지께 사죄드리고 건강을 기원합니다.) 


사고가 난 후, 누군가  사고에 대해 물으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새로 생긴 길이라 차량이 많지 않고 신호등이 제대로 작동 안 된 적도 많아서

다들 신호 무시하고 달리더라고요...

그래서 저도 처음엔 신호를 잘 지켰는데, 다들 그렇게 하니 따라 하게 됐어요.

휴... 제가 운이 나빴던 거예요...."



그런데  사고 후 어느 날 운전하다 무심코 주변을 둘러보니 사고 현장 앞이었다. 둘러보니 건너편의  차들도 얌전히 신호를 지키고 있었다.  


전에는 왜 신호를 무시하는 차들만 보였을까?


간혹 말이다.

신호등이 이상하다고..  도로가 잘못됐다고..

다들 그렇게 하는데 왜 하필 나냐고~

왜 나만 재수 없게 이런 일이 생기냐고~


자기가 행한 오류, 문제점을 직시하지 않고 자기 합리화에 급급한 경우가 있다.


중개업을 하면서 문제 생겼다고 상담해오는 내용들을 보면 거의 하지 말아야 했던 계약, 혹은 실수, 오류, 간과.. 등이 있었던 중개 건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한결같이 다들 그렇게 하길래 나도 한 건데....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고 억울해한다.



그러나

아무리 한적한 길이라도

아무리 번잡한 도로라도,

정해진 신호만 잘 지킨다면

내 과실의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들 그렇게 하더라, 그렇게 해도 별 문제없더라 는 것이 내가 그렇게 해도 되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재수 없어서 문제가 터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에 터지는 순간이 꼭 오는 것이다.


나는 죽을 뻔했던 사고를 늘 기억하며 잘못을 바로 보려 하지 않고 합리화로 치장했던 지난 시간들을 고백하는 계기로 삼는다.


그리고 이젠 아무리 한적한 길이라도,

아무리 뒷 차가 빵빵대도 고집스럽게 신호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왜냐면 아무도 못 본 것 같아도

블랙박스는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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