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갱도요새 Apr 05. 2021

변호사가 듣기 싫은 이혼사유

왜 이혼하는지 알겠다.



변호사는 온전히 의뢰인의 편이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 과정에서 변호사 선임을 하고 위안을 얻는데, 누군가가 온전히 자기 말을 들어주고 편을 들어주는 경험을 별로 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혼인기간 동안의 고통을 그렇게라도 덜 수 있다면 변호사로서는 참으로 보람찬 일이 아닐 수 없다. 이혼 전문 변호사로서 일차적으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역시 의뢰인의 말을 경청하고 공감하는 능력인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의뢰인 편을 들어주고 싶어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경우에는 '그건 아니지 않나요?'라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차오른다. 듣고 있으면 이 사람과 살아온 상대방이 불쌍해지는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1. 아내가 아침밥을 안 차려줍니다.


이런 걸 이혼 사유로 주장한다고? 라는 생각이 먼저 들겠지만 놀랍게도 굉장히 많은 남자 의뢰인들이 위와 같은 말을 한다. 아침 점심 저녁이 다 있는데 유독 아침에만 집착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는데, 더 웃긴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에 실제로 아내가 아침을 안 차려준 경우는 별로 없다는 것이다. '아침밥을 차려준다'의 기준은 아침에 일어나서 새로한 밥과 국, 냉장고에서 꺼낸 밑반찬이 아닌 새로 한 반찬 서너가지를 올려놓은 밥상을 주는 것이다. 밥솥에서 꺼낸 밥과 냉장고에서 꺼내준 반찬은, 아침을 '차려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당연하게도 아내는 맞벌이를 하거나, 자녀들을 챙겨 등원, 등교준비를 하느라 정신이 없다. 바쁜 아내의 모습은 눈에 안 들어오고, 어디서 생겨먹은 환상인지 '아침밥을 차려주는' 아내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은 손이 없으세요? 왜 밥을 스스로 못드세요? 그렇게 아침이 중요하면 왜 아내분에게 아침밥은 안차려주시나요? 라는 말을 애써 꾹꾹 눌러 참고, 그냥 공감도 해주지 않고 아무 대꾸를 하지 않는다. 여자 의뢰인이 '남편이 아침밥을 안차려줘서요'라고 말 하는 건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2. 내가 원할 때 성관계를 안해줍니다.


이혼에 이를 정도면 서로 사이가 안 좋으니 성관계를 하지 않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 유형 의뢰인들의 특징은 '내'가 원할 때 배우자가 무조건 성관계에 응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배우자에 대한 폭력이라는 생각 자체를 못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감정이나 몸상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이 원할 때 욕구만 풀면 된다는 심보인데, 배우자는 욕구를 풀 대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형법은 (당연하지만) 배우자에 대한 강간죄도 성립된다.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의뢰인을 대리할 때 상대방이 늘 '배우자의 강압적 성관계 강요' 내지 '폭력'을 반소사유로 주장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하다. 

배우자가 성관계를 거부한다면, 배우자에게 그런 기분이 들게끔 로맨틱한 무드를 조성해본다던지 외모를 꾸며본다던지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해야 할텐데 그렇지도 않다. 그냥 찌푸러지는 미간을 애써 감추며, '어차피 성관계 안 한 건 입증하기도 어려우니, 해당 내용은 간단하게 정리하고 다른 것에 집중하시지요.'라고 의뢰인에게 설명해준다. 


3. (생활비를 충분히 받으면서)생활비를 안 줍니다.


물론 정말 생활비를 못 받은 경우에는 당연히 문제가 되고 이혼사유로 주장할만 하다. 하지만 생활비를 받지 못했다고 하는 의뢰인 중 많은 사람들은 배우자 명의의 통장에서 각종 공과금과 카드대금이 빠져나가고, 통신비, 보험비, 주거비 등의 돈이 빠져나가는 것을 '생활비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생활에 드는 돈을 제외하고 실제 현금으로 쥐어준 돈이 없다는 것을 '생활비를 안 준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배우자 사이에 서로 부양을 할 의무는 있지만 생활비를 넘어서는 용돈까지 반드시 줘야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현금이 없다는 건 배우자로서 당연히 섭섭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혼사유가 되지는 않는다. 재판장님한테서 "생활비는 충분히 지급된 것 같은데요."라는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4. (본인도 안하면서)우리 부모님한테 효도를 안 합니다.

 

부모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효도를 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효도는 셀프고, 내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배우자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 전통적 가치관을 가진 나이드신 분들 생각은 좀 다를 수 있겠지만 매일 급격하게 바뀌는 세상에서 언제까지 구시대처럼 살 수는 없는 일이다.

배우자의 부모님에게 전화 한 통 하지 않으면서 배우자에게 내 부모님에게 매일 전화를 드리라고 강요하는 의뢰인, 배우자의 부모님이 암투병을 할 때는 돈 50만원 보내는 것도 아까워했으면서 내 부모님이 아프자 배우자에게 병수발을 들라고 하는 의뢰인, 배우자 부모님에게는 용돈 만원도 안 보내면서 우리 부모님이 나를 키워줬으니 용돈으로 매달 100만원을 보내자는 의뢰인 등 터무니 없는 요구를 배우자에게 해놓고는 그걸 배우자가 힘들어하면 이혼사유라고 주장한다. 너나 잘하세요, 라는 금자씨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변호사가 듣기 싫은 이혼사유라고 제목을 썼지만, 십중팔구는 판사도 위와 같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만약 위에 나열한 이유들로 이혼을 고민중이라면 혼인생활이 파탄에 이른 것이 본인의 가치관이나 행동 때문은 아니었는지 조금은 반성을 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법정에서 위 사유만으로 이혼을 하긴 어려우니 조용히 협의이혼을 하는 것을 추천드린다.(물론 의미있는 다른 법정 이혼사유가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경우에는 이혼소송을 진행하는 것에 아무 어려움이 없다.)


위와 비슷한 류의 말을 하는 의뢰인들은 생각보다 정말 많다. 매우 요약해서 적었지만 저런 이혼사유를 굳이 설명하기 위해서는 혼인생활 전반에 대한 시시콜콜한 모든 이야기를 다 들어야 한다. 상담하는 내내 저런 말을 듣고 있으면 고구마 100개를 한꺼번에 삼킨 것 같은 답답함을 느낀다. 


위와 같은 이혼사유를 주장해야 할 때가 있다. 판사도 저런 말을 듣고싶지 않다는 것을 잘 알기에(당연히 법적으로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승패에도 아무 영향이 없다.) 최대한 축약해서 서면에 작성한다. 그러면 의뢰인들은 왜 그렇게 조금밖에 안 적어줬냐며 다시 A4 50장짜리 자기 인생에 대한 한탄문을 보내온다. 잘못된 가치관과 행동들로 가득한 그 한탄문을 보고 있자면 야근하며 그걸 읽어야 하는 내 인생이 불쌍해진다. 

        


별 수 없이 방에 구비해둔 맥주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답답한 심경을 맥주로 달래가며 일필휘지로 서면을 쓴다. 의뢰인의 한탄문의 모든 내용을 담아, 말도 안 되는 이혼사유를 말이 되는 것 마냥, 상대방을 마구 헐뜯으며, 마치 한 편의 자서전을 쓰는 심정으로. 맥주와 함께 써내려간 서면을 받아본 의뢰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린다. 변호사님이 제 마음을 너무 잘 알아주신다고. 



그렇게라도 위로가 됬다면 정말 다행이겠다.

의뢰인의 심경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무의미한 이혼사유를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맥주가 간에 스치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벼락거지가 된 30대 부부들에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