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랑 동생이 JTBC에서 방영하는 <팬텀싱어>를 엄청 좋아한다. 나는 시즌1은 아주 인상 깊게 봤는데 그 뒤엔 안 봤고, 엄마랑 동생이 하도 열심히 들어서 노래만 안다. 얼마 전 팬텀싱어의 올스타전을 방영한 모양이다. 동생이 들어보라며 유튜브 링크를 보내주기도 하고, 본가에 놀러 가면 TV로 그냥 계속 틀어줘서 강제 시청을 하게 된다. 이전 시즌과 거의 유사한 편곡과 화음, 목소리톤, 곡 전개에 정말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겨울소리>는 그나마 좀 좋았다.
그중에서 제일 충격적으로 별로였던 건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곡 <Seasons of Love>였다.
뮤지컬 <렌트>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첫 음 건반 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뛸 정도로 좋다. 물론 원곡이 더 익숙하고 좋지만 한국판 가사도 번안이 잘 되어 듣기에 아주 예쁘다. 오십이만 오천육백분의 시간 내내 들어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좋은 노래다. 아마 뮤지컬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여기저기 행사에서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반주도 곡도 쉬워서 무슨 행사마다 단체로 부르게 시키는 경우가 많다.).
팬텀싱어에는 노래를 잘하는 좋은 음악가들이 많으니 당연히 좋을 것 같았는데 결혼식에서 오합지졸 합창단이 불렀던 것보다도 별로였다. 이 노래가 이렇게 단순한 멜로디를 가졌고, 아무 변화도 없는 노래였구나 싶었다. 정말 너무 별로여서 내가 여태 이런 노래를 좋아했나 싶을 정도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답은 너무 명백했다. 아무런 다양성도 없었던 것이다. 36명의 남자들로만 이루어진 합창은 아무리 성부를 나누어봤자 획일화된 집단이었다. <렌트>는 그렇지 않다. 흑인, 백인, 여성, 남성, 레즈비언, 게이 모두가 나와 노래를 부른다. 제일 많이 알려진 영화 버전 Seasons of love에서는 끝내주는 고음은 조앤(흑인 여성이고 레즈비언인 변호사 캐릭터다.)과 콜린스(흑인 남성이고 게이 캐릭터다.)가 부른다.
단조로운 멜로디에도 얼마든지 생명력과 감동을 불어넣어줄 수 있는 것이 '다양성'이라는 것을 새삼 느꼈다. 그 다양성이 듣는 사람에게 벅찬 눈물을 흘리게 하고, 오십이만 오천육백분의 시간을 사랑으로 어떻게 잴 수 있을까 고민하게 만든다. 다양성을 잃은 Seasons of love는 그냥 단조로운 멜로디 라인을 가진 흔한 노래였다. 아무 감동도 없고, 무대에 서있던 저 36명의 출연진들마저 '끝났다'라는 안도감 외에는 아무런 감흥 없어하는 게 느껴지는 무대였다. <렌트>에도 출연했던 배두훈 배우는 저 노래를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 팬텀싱어 제작자들도 아마 슬슬 한계를 느끼지 않을까 싶은데(그렇다기엔 근데 타겟층이 정말 구매력이 대단하다.) 언제나 정답은 '다양성'에 있다.
우리나라의 모든 가족 관련 정책은 '정상가족'으로 획일화되어 꾸려진다(물론 한부모가정 지원 등의 정책도 있지만 '정상가족'이 정상적인 가족형태라는 인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정상가족'이라는 단어 자체도 웃긴데, 아무튼 그 정의는 엄마, 아빠, 정상 자녀(들)로 이루어진 전형적 형태의 핵가족을 말한다. 사유리처럼 비혼 가족은 물론이고 미혼부 미혼모 가족, 한부모가족, 단순 동거하는 가족, 입양가족, 재혼가족, 동성결혼 가족 등 다른 모든 형태의 가족은 정상이 아니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셈이다.
<건강가정기본법>이라는 웃기는 이름의 법도 제정되어 있다. 이 법은 '가족'을 혼인ㆍ혈연ㆍ입양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기본단위라고 정의해놓았다. 그런데 가족을 혼인, 혈연, 입양으로만 규정하다 보니 우리나라 가구수의 30% 이상인 1인 가구를 설명할 길이 없어졌다. 그래서 이 법은 궁색하게도 '1인 가구'를 따로 정의하는 정의 규정을 만들었다.
저 법에서 가장 웃기는 부분은 바로 8조와 9조다. 제8조 제1항은 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제9조는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가족해체를 예방하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하고,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가족해체를 예방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도와 시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규정한다.
남녀가 혼인을 해서 출산을 하는 것 외에는 다 건강한 가정이 아니라고 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혼인과 출산'을 장려해야 하다 보니 혼인을 안 하는 비혼주의자들도 건강하지 않고, 혼인을 해서 자식을 안 낳는 딩크족도 건강하지 않고, 혼자 사는 1인 가구도 건강하지 않고, '가족해체를 예방'해야 하다 보니 이혼한 가족도 건강하지 않고, 재혼한 가족도 건강하지 않고, 한부모 가족도 건강하지 않다. 그야말로 정상가족이라는 개념에만 집착하면서 모든 다양성을 무시한다. 가상화폐를 놀리려고 만든 가상화폐를 들고 달로 가자고 떠들어대는 미래지향적 세상에서 동성혼은 법으로 허락조차 안 해준다.
하지만 '정상가족'에 집착하고 그걸 놓지 못하고 있는 동안 필연적으로 세상은 너무 빠르게 바뀌고 있다. 우리나라는 매년 10만~11만 건 이상의 이혼이 이루어진다. 당연히 별거 가족이 증가하고 엄마 혼자, 혹은 아빠 혼자 자녀를 키우는 경우가 매년 늘어나고 있고, 이미 우리나라 한부모가정은 152만 9000가구에 달한다. 재혼가족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1인 가구 비율은 2019년에 이미 30%를 넘겼고(614만 7,516가구다.) 평균 가구원수는 2.4명으로 줄었다. 0.4인분 형태의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이상 '정상가족' 기준에서 보면 평균 가구원수마저 정상적이지 않은 셈이다. 정확한 통계자료는 없겠지만 동성혼을 원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 시트콤 <모던 패밀리>의 등장인물들. 재혼한 제이와 글로리아, 글로리아의 전혼에서 아들인 매니 / 클레어와 필 부부와 자녀들 / 동성 결혼한 팸과 미첼, 입양한 자녀인 릴리.
'정상가족' 같은 건 없다. 어떠한 형태의 가족이든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다들 '정상가족'이라는 획일화된 기준만을 가지고 아무런 다양성도 추구하지 않는다.
한부모 가정이라고 해서 자녀가 무언가 결핍되었다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 이혼했건, 사별했건, 뭐 어떤 이유 건간에 혼자서 자녀를 키우는 것에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부모님이 둘 다 있다고 해서 둘 다 온전히 자녀에게 시간을 쏟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한부모 가정이 힘든 건 그냥 둘이 할 일을 혼자 해야 해서 힘든 것뿐이다. 그냥 그런 부분을 배려해주고 지원해주면 된다.
재혼가정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릴 때 콩쥐팥쥐니 신데렐라니 하는 동화만 읽어서 그런지 다들 재혼해서 생긴 엄마나 아빠를 무시무시한 마귀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재혼을 했어도 얼마든지 사랑으로 키워줄 수 있다. 만약 재혼해서 생긴 자식이라 신데렐라처럼 학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이 있다면, 그냥 자기가 낳은 자식도 학대를 했을 사람이다.
한부모 가정과 재혼가정이 그렇지 않은 가정과 비교했을 때 불편한 게 딱 하나 있다면 그건 사람들의 선입견이다. 뭔가 결핍되어 있고, 불쌍하다는 듯 보는 시선 그 자체가 문제다. 그것 외에는 정말로 아무 문제가 없다. 문제가 있다면 '정상가족'도 가지고 있는 똑같은 문제뿐이다.
사유리처럼 비혼인 사람도 자식을 가지고 싶을 수 있다. 우리나라 출생률은 0.92까지 떨어졌다. 출생률을 올리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비혼인데 자식을 낳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한 명도 안 낳는 세상에서 정부는 이미 혼인해서 아이를 낳은 부부들에게만 아이를 더 낳으면 다자녀 혜택을 준다며 생색을 낸다(셋 이상은 안 낳을 것이라는 걸 잘 알기에 아무 혜택이나 던져보는 것 같다.). 비혼 출산을 장려하지 않을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를 일이다.
혼자 살든 둘이 살든 셋이 살든 제대로 된 공간이 필요한데, 정부는 1인 가구 주택지원을 한다면서 관광호텔을 원룸으로 바꾼 집에 살라며 대단한 정책인 양 생색을 낸다. 1인 가구는 혼인하기 전의 '안 건강한' 상태이기 때문에 결혼해서 정상가족이 된 이후에 제대로 된 집을 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1인 가구는 다음 단계로 가기 전의 잠깐 거쳐가는 시기가 아니다. 설령 잠깐 거쳐가는 시기라고 해도 부엌도 없는 집에 살 이유는 없다. 1인 가구에게도 온전한 집이 필요하다.
동성결혼은 도대체 왜 허락하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동성 결혼에 반대하는 이유 중 단 하나도 그럴듯한 것을 보지 못했다. 보수 기독교 단체보다 많은 돈을 로비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아마 진작에 동성결혼도 허용되었을 것이다. 2019년 보호대상 아동수는 4,500명이었는데 그중 681명만 입양되었다. 동성결혼을 허락하면 입양건수가 늘어날 수도 있는 일이다.
어떤 형태의 가족이건 포용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게 해 줘야지, '건강한 정상가족'을 만들려고 하면 안 된다. 설령 '정상가족'이 정부 정책의 지향점이라고 하더라도 다른 형태의 가족을 건강하지 않다고 폄훼하고 제대로 지원조차 해주지 않을 근거는 되지 않는다. 모든 다양한 형태의 가정을 존중하고 포용해주어야 모든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가정은 그야말로 안식처니까.
다양성이 삶을 풍요롭게 해 주고,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준다.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사회도 더 안정적으로 굴러갈 수 있다.
<Seasons of Love>는 '다양성'을 고스란히 녹여 온전히 포용하고 있기에 아름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