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어버이날이다. 5월은 정말 하루가 멀다 하고 뭔가 날이 있다. 본가에 가려고 했는데 급하게 쓸 서면이 너무 많아서 못 갔다. 왜 꼭 복잡한 재판들은 몰려 있는지 의문이다. 전국 법원이 짜고 변론기일을 정하는 것도 아닐 텐데 꼭 그렇다. 가정의 달이라 그런지 이혼사건 상담은 잘 안 오고 형사사건 상담만 엄청 많다.
많은 부모님이 그렇듯 우리 부모님도 큰딸이 '사'자 들어가는 직업을 가졌다는 것을 매우 자랑스러워하신다. 지난 주말에 본가에 놀러 갔더니 아빠는 '판사가 되면 연금을 받을 수 있다'라는 말로 판사가 되어야 한다고 부추기면서 아직도 판사 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표현을 하긴 했는데 아무튼 변호사도 자랑스러워 하긴 하는 것 같다. 연금을 받으려고 판사가 되느니 그냥 오피스텔을 사서 매월 월세를 받는 것이 빠를 것 같긴 한데, 판사 딸을 가지고 싶다는 말을 노골적으로 하긴 그러니 저렇게 돌려 말하는 것 같다.
사실 변호사의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고 나 스스로도 그렇게 자랑스러운진 모르겠는데 그래도 부모님이 좋아하시니까 나도 좋다. 하지만 존리 같은 사람들 말마따나 변호사 딸을 키울 돈으로 주식을 샀으면(?) 더 행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요즘도 금수저만 변호사가 될 수 있다느니 하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내가 변호사가 된 것은 퍽이나 웃긴 일이다. 지금은 꽤 풍족하게 살고 있지만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어릴 땐 그렇게 여유 있진 않았다. 그렇다고 가난하다기엔 먹고사는 데엔 별 문제가 없었고, 금수저는 아니고 밥 먹을 수 있는 밥수저임엔 틀림이 없었다.
비싼 생일 케이크 대신 모카빵에 초를 꽂았고, 바퀴벌레가 자주 나오는 빌라에 살았다. 조금 더 커서는 뒷산을 넘어가야 학교가 나오는, 아파트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오래된 1동짜리 저층 아파트에 살았다. 그 아파트는 안방 문이 고장 나서 안에서 절대 잠그면 안 되는 구조였고, 현관문도 고장 나서 잠금장치 두 개를 다 잠그면 문이 안 열렸는데 우리 집에 놀러 왔던 꼬맹이가 그걸 잠그는 바람에 119가 출동한 적도 있었다. 종종 레토르트 미트볼 한팩을 데워서 동생이랑 나눠 먹었는데 늘 더 먹고 싶어 하는 나에게 착한 내 동생은 기꺼이 자기 몫의 미트볼을 나한테 더 양보해줬다. 남이 버린 걸 주워온 가구도 우리 집엔 정말 많았다.
그래도 나는 아주 풍요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엄마 아빠는 내가 자랑스럽고 대단하다고 말하지만, 아마 금수저도 아닌 내가 스카이캐슬 같은 엄청난 사교육 없이도 변호사가 될 수 있었던 건 우리 부모님의 밥수저 양육법 덕분일 것이다.
미니어쳐 술에 심취해 있는 양갱도요새 어린이. 저 때도 술을 즐겨마시진 않았을 거고 아마 할아버지의 술인 것 같다.
엄마 아빠는 돈을 거의 안 쓴다. 자식을 셋이나 키우다 보니 돈을 안 쓰는 것이 습관이 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나를 키울 땐 분명 엄마 아빠도 쓰고 싶은 돈이 많았던 30대 시절이었을 텐데 그때도 돈을 안 썼다.
대신 그 돈으로 어린 나에게 동화책과 그림책을 잔뜩 사주고 시간이 날 때마다 항상 책을 읽어줬다. 프뢰벨 세계명작동화 전집은 거의 다 외울 정도로 들었다.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인형의 집을 사달라고 했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사줘서 좀 울기도 했다. (그래도 선물로 받은 거라 다 읽었다.) 아빠는 주말마다 도서관에도 꼭 데려가 줬다. 책에선 돈 없이도 모든 경험을 다 해볼 수 있었다. 덕분에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서는 장편 창작 소설을 써서 방학숙제로 냈다. 방학숙제로 장편소설 쓰는 어린이는 내가 처음이었는지 상도 받았다. 30대가 된 지금은 맨날 야근하며 분노의 서면을 쓰고, 시간을 내서 브런치에 글을 쓰고 있다.
아빠는 영화광인데, 아빠가 사고 싶었을 비디오테이프를 안 사고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잔뜩 사다 줬다. 내 기억으론 분명 정품이 아닌 복사본이나 번들판이 더 많았는데, 아빠가 그걸 어디서 구한 건지 외국판을 그대로 가져왔고 당연하게도 자막이 없었다. 별 수 없이 그냥 영어로만 봤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은 자막이 없어도 알아듣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그림만 봐도 눈치로 이해가 되니까. 요새 애들도 그렇듯 우리는 디즈니에 열광했고, 다 외울 정도로 돌려봤다. 그래서 그 흔한 교환학생 한 번 못 다녀왔지만 지금도 영어를 눈치로 잘한다. 디즈니로 영어를 배운 아이는 다 커서 월트 디즈니의 주식을 샀다.
어렸을 때 살았던 동네엔 시장에 상영관이 단 하나인 작은 극장이 있었는데, 엄마 아빠는 거기에도 나를 자주 데려갔다. 내가 조금 더 크고 나선 엄마 아빠가 퇴근하고 나서 멀리까지 심야영화를 같이 보러 갔다. 아빠는 비디오테이프를 자주 빌려왔고, 나는 온갖 영화를 다 봤다. 잘 기억도 안 나는 <은행나무침대>니 <8월의 크리스마스>니 하는 영화를 엄마 아빠랑 같이 집에 앉아서 봤다. 지금도 영화를 참 좋아한다. 혼자 영화관 가서 영화 한 편 보고 집에 들어가는 것이 낙....이었는데 야근이 너무 많아지면서 잘 못한다.
나는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는데, 안타깝게도 동생이랑 크레파스로 집 벽지에 잔뜩 낙서를 해버렸다. 엄마는 그걸 보고 벽에 전지를 여러 장 붙여줬는데 나는 전지에다가 실컷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전지만큼 왕 큰 사람을 네 명 그려버렸다. 그래서 엄마는 전지를 떼어내고 기꺼이 우리에게 벽을 내주었다. 신나서 집안 벽을 다 크레파스로 채웠다. 이사 갈 때 벽지를 새로 하느라 얼마를 썼을지는 아직도 차마 못 물어봤다. 나한테 조금이라도 창의력이 있다면 아마 그 벽에서 나왔을 것이다. 근데 집이 작은 평수여서 그랬는지 창의력이 또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엄마 아빠는 모든 예술을 매우 사랑했다. 주말에 우리를 데리고 각종 미술관과 공연장에 다녔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옆에서 술래잡기를 하고, 이응노의 그림을 따라 그렸다. 현대미술관은 최고의 놀이터였다. 학전블루의 쿰쿰한 냄새를 맡으며 대학로의 뮤지컬을 섭렵했고, (어린이는 예나 지금이나 공연장에 못 들어가게 하는지라) 7살 넘었다고 뻥을 치면서 사라 장이나 백건우의 연주를 보러 다녔다. 좌석은 오페라글라스 써도 잘 안 보일 정도로 엄청 구렸는데, 소리만 들으면 좋았다. 티켓을 다 사기엔 돈이 부족했는지 아빠는 공연장 밖에서 기다릴 때도 있었다. 손바닥이 아플 때까지 박수를 치면서 보았던 그 공연들은 아직도 나를 풍요롭게 한다. (지금도 그때 버릇을 못 버려서 VIP석은 예매를 못하고 맨날 40% 이상 할인할 때만 골라서 A석, B석만 간다.)
중고등학생 시절에는 당연히 공부하라고 잔소리도 했다. 그래도 다른 친구들처럼 학원에 억지로 보내진 않았다. 대신 문제집이나 학원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학원이 필요할 땐 말했고, 필요 없을 것 같을 땐 그만 다니고 싶다고 했다. 엄마 아빠는 한 번도 그 결정에 반대한 적이 없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계속 11시까지 야간 자율학습을 했는데, 우리 아빠는 끝날 시간에 맞춰서 정문으로 나를 항상 데리러 왔다. 사춘기 때 다 그렇듯 아빠랑 자주 싸웠는데, 싸워도 데리러 왔다. 말 한 마디도 안하면서 집에 같이 왔다. 아빠가 없었으면 어떻게 공부했을까 잘 상상이 안 된다.
그렇게 나에게 아낌 없이 모든 것을 해주고자 했던 부모님 덕분에 나는 즐겁게 살아가는 변호사가 되었다. 잘 나가고 똑똑한 변호사는 아닐지 몰라도, 따뜻하고 사람 좋아하는 변호사가 되었다.
글을 쓰다 보니 왜 그런지 모르겠는데 계속 눈물이 나는데, 역시 엄마 아빠 생각하면 눈물 나는 건 국룰이다. 뭐 대단히 멀리 사는 것도 아니고 주말에 보고 왔는데도! 물론 엄마 아빠한테 장점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명백한 단점도 있었는데 둘 다 칭찬과 애정표현에 되게 인색했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칭찬받는 것이 어색하고 애정표현을 못 한다. 당장 내일도 엄마 아빠한테 뭔가 감사하고 사랑한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데, 쉽지 않다. 애정표현엔 MSG를 좀 팍팍 쳐줘야 되는데, 우리 가족의 애정표현방법은 재료 본연의 맛을 자랑한다.
그래도 어버이날에는 좀 오글거리는 말도 해야 된다. 엄마 아빠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만큼이나 나도 엄마 아빠를 자랑스러워한다고, 내가 조금이라도 훌륭한 딸이라면 그건 다 나를 훌륭하게 키워준 엄마 아빠 덕분이라고 꼭 전하고 싶다.
엄마, 아빠 사랑해요.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