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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Jun 01. 2021

꽈리고추멸치볶음은 무죄

아무튼 죄가 없습니다.

본가에 가면 항상 냉장고에 있는 반찬은 꽈리고추멸치볶음이다. 한 번도 없는 걸 본 적이 없다. 어느 가정집에서든 밥도둑으로 맹활약 중이다. 이걸 꽈리고추멸치조림이라고 하는 집도 있고 꽈리고추멸치볶음이라고 하는 집도 있는데 간장이 완전 스며들 때까지 오래 뭉근히 졸이는 집은 조림이라고 할 것이고 센 불에 휘리릭 볶아내는 집은 볶음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집은 볶음이다. 편마늘도 같이 볶아서 한 번 볶으면 집안에 고소한 마늘냄새와 간장 냄새가 솔솔 난다. 식욕을 돋우는 냄새다.


아빠는 장 볼 때마다 늘 엄청 긴 꽈리고추를 사 온다. 여기서 우리 부모님의 갈등이 시작된다. 엄마는 긴 꽈리고추를 먹기 편하게 잘라서 조리하고, 아빠는 통째로 조리하는 걸 선호한다. 아빠는 꽈리고추를 자르면 꽈리고추의 채즙이나 씨가 날아가서 맛이 떨어진다고 하면서 엄마가 꽈리고추를 잘라서 조리하는 걸 아주 싫어한다. 요즘은 좀 타협을 했는지 늘 잘라진 고추가 들어있다. 나는 황희 정승 스타일로 자른 꽈리고추든 안 자른 꽈리고추든 다 옳구나 하고 먹는다.


아빠의 요리 세계는 아주 심오하다. 아빠 나름의 요리 철학이 있어서 레시피를 찾아보지 않는다. 멸치육수를 내면서 멸치를 건져내지 않아 국물에 멸치 껍질이 둥둥 떠다니고 비린내가 난다던지, 카레를 하는데 카레국이 될 정도로 물을 많이 붓고 재료를 깍둑썰기 하는 게 아니라 다져버린다든지, 전을 부치는 데 기름을 왕창 부어 전튀김을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식이다. 심오한 요리 세계를 가진 아빠가 자꾸 요리하는 것에 대해 잔소리를 하니까 요리왕 엄마는 화가 날 수밖에.


근데 또 아빠는 안 자른 꽈리고추를 먹고 싶기 때문에 아빠가 직접 요리할 때도 있는데, 간장을 거의 쏟아부었다. 온 집안에 간장 냄새가 났다. 내가 사워크라우트를 왕창 만들었을 때 났던 식초 냄새보다 더 심하게 간장 냄새가 났다. 꽈리고추랑 멸치를 왕창 때려 넣어도 간장 3~4큰술 정도면 충분할 텐데 얼마나 넣은 것인지 의문이다. 아무튼 아빠의 요리 세계는 아주 심오하다. 아빠의 레시피북을 한 번 내달라고 요청하고 싶을 정도다.


꽈리고추 멸치볶음의 꽈리고추를 자를 것인지를 놓고도 싸울 수 있는 것이 부부 사이다. 서로 달라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이 평생을 함께 하기로 한 것이니 사소한 일에서도 계속 부딪칠 수밖에 없다.



부부 사이는 일심동체라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말 때문에 너무 많은 부부들이 일심동체가 되지 못하는 것에 대해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혼 소송을 하는 모든 의뢰인들이 배우자를 절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데, 사실 그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부 사이든 뭐든 사람이 두 명 모이면 이심이체(二心異體)다. 혼자만의 마음도 수시로 갈팡질팡 하는데 남이랑 마음이 똑같다니 진짜 되지도 않는 소리다. 


서로 생각이 완전히 똑같은 사람은 어디에도 없고, 설령 완전히 똑같은 사람을 찾아서 결혼해봤자 서로 취향까지 똑같을 테니 무엇이든 양보하기가 힘들어서 또 싸우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배우자의 사고방식이 너무 달라서 자신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며, 혹은 배우자를 전혀 이해할 수 없다며 싸움을 늘릴 필요가 없다. 다른 것은 그냥 다르다고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그만이다.


꽈리고추 자르는 취향부터 다르다 보니, 당연히 또 먹는 취향이 달라서 엄마는 멸치파고 아빠는 꽈리고추파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멸치와 꽈리고추가 모두 싹 비워진다. 둘 다 취향이 똑같아서 멸치만 먹거나 꽈리고추만 먹는다면 맨날 남는 멸치나 꽈리고추를 누군가는 억지로 먹어야 할 거고, 아니면 그냥 버려야 할 거다. 다행스럽게도 엄마 아빠는 취향이 달라서 훌륭하게 밸런스가 맞는다. 엄마 아빠가 티격태격하는 것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지만, 역설적으로 둘이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것이 싸움의 원인을 제공하기도 하지만, 서로 달라서 또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것이 부부 사이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은 서로의 부족한 면을 채워주고, 더 다양한 경험을 함께할 수 있다. 세상엔 제로섬 게임뿐인 것 같지만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플러스섬이 가능하다. 배우자랑 너무 달라서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달라서 여태까지 같이 살아왔구나 하고 관점을 바꾸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서로 다른 것을 받아들이면 그 뒤에 배우자의 행동을 받아들이고 대응하는 것은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다. 상대방을 이해시켜야 한다는, 혹은 상대방을 완전히 이해해야 한다는 강박을 버리면 많은 것이 쉬워질 것이다. 


꽈리고추 멸치볶음은 아무 잘못이 없다. 어차피 꽈리고추를 왜 잘라야 하는지, 왜 안 잘라야 하는지 서로 아무리 설득을 하려고 해 봤자 서로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그냥 아빠는 엄마가 요리하는 것에 간섭하지 말고, 엄마는 어차피 꽈리고추 많이 안 먹으니까 그냥 엄마가 먹을 양만 자르고 나머지는 통으로 요리하면 꽈리고추를 둘러싼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재판장님, 이처럼 피고인 꽈리고추멸치볶음은 부부싸움의 원인을 제공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 공소사실에 해당하는 범행을 저지르지 아니하였는바,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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