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 특정이 잘못되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밑반찬 중에 제일 좋아하는 건 계란 장조림이다. 계란을 간장에 조릴 생각을 하다니 도대체 최초로 이런 엄청난 생각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간장물에 동동 떠있는 계란을 보기만 해도 따뜻한 밥 생각이 절로 난다. 밥상에도 지구온난화의 영향이 미치는 것인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더운 여름에 불을 덜 쓰고 요리할 수 있는 마약계란장까지 등장했다. 당연히 이것도 맛있다. 계란은 완전식품이고 계란 장조림은 완전밥도둑이다.
나는 삶은 계란의 뻑뻑한 계란 노른자를 싫어해서 늘 흰자만 먹고 노른자를 빼서 버린다. 후라이도 늘 노른자를 터뜨리지 않고, 샌드위치에 계란을 넣을 땐 주로 우유를 넣어 스크램블을 만든다. 애초에 장조림에 넣을 계란을 삶을 때 반숙으로 하면 될 텐데 우리 집은 다 완숙파였어서 어쩔 방법이 없었다. 노른자를 버리면 되니 나도 큰 불만이 없었다. 근데 계란값이 너무 비싸지다 보니 빼서 버리는 노른자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서 계란 장조림의 노른자를 퍽퍽 부숴서 밥에 비벼먹기 시작했다. 장조림 국물을 살짝 부어서 노른자랑 비벼먹으면 덜 퍽퍽하고 먹을만하다. 포슬포슬해진 노른자는 제법 밥 색깔도 예쁘게 한다.
엄마는 계란 장조림을 만들 때 계란에 항상 칼집을 내줬다. 그러면 노른자까지 간이 배기도 하고, 흰자를 칼집 따라 작게 잘라먹기도 편했다. 맛있는 것만 먹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위해 계란 장조림만큼 훌륭한 밑반찬은 없으리라 믿는다. 계란 싫어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으니까. 심지어 우리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삶은 계란을 좋아한다. 계란이 미끄러운지 잘 씹어먹지를 못해서 자꾸 흘리는 게 문제다.
아주 어릴 때 동생이 계란 장조림을 '통조림'이라고 부른 적이 있다. 너무 어릴 때였어서 말실수였는지 그냥 웃기게 말하려고 한 건지 상황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무튼 우리 가족은 저 단어가 퍽 마음에 들었다. 그 뒤로 우리 가족은 종종 장조림을 '통조림'이라고 불렀다. 소고기가 들어간 계란 장조림은 그냥 장조림인데, 계란만 들어간 계란 장조림은 통조림이다. 남들은 통조림이라고 하면 실제 통조림을 떠올릴 테니 우리 가족만의 언어인 셈이다. 우리 집에서도 늦둥이인 막냇동생은 저 수상쩍은 단어의 기원을 모른다.
우리 집이 계란 장조림을 종종 통조림이라고 하는 것처럼 어느 가정이든 그 가정만의 고유한 언어와 생활방식이 있다. 100개의 가정이 있으면 100개의 가정 문화가 있는 셈이다. 다른 가정에서 온 사람은 결코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설명을 해주면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고유한 정서와 생각까지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다. 각 가정의 고유한 특성은 그 가정에서 지내는 사람의 가치관이나 생활방식을 결정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래서 이혼이나 상속 관련 소송처럼 가정사가 밀접하게 연관된 소송을 진행하려면 그 가정의 고유한 특성을 이해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혼이나 상속 관련 소송을 진행할 때 의뢰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그 가정의 고유한 특성을 변호사나 판사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의뢰인에게 "배우자한테서 들은 폭언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세요."라고 했을 때, 많은 의뢰인들은 "야!", "퇴근하고 청소나 좀 해놓지 뭐했어?" 같이 일상적인 말들을 폭언이라고 주장한다. 그게 왜 폭언이냐고 물어보면 그제야 설명을 해준다. 자기는 배우자가 자신을 '야'라고 부르는 것을 참을 수 없는 환경에서 자랐고, '야'라고 지칭하는 자체가 폭언이라는 것이다. 또 자신은 아무도 자기에게 간섭하지 않는 환경에서 살아왔고, 배우자가 뭘 해놓으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폭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의뢰인이 자라온 가정에서는 그런 사고방식이 당연한 것이었겠지만, 그 가정에서 자라지 않은 제삼자인 배우자나 변호사, 판사가 보기에는 얼토당토않은 소리인 것이다. 내가 계란 장조림을 떠올리며 지인들에게 "밑반찬으로 통조림 맛있게 나오는 집 어디 없어?"라고 물어보면 그 누구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치다. 이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건 나랑 같은 가정에서 생활한 우리 집 식구들 뿐이다. 그 가정 내에서만 통하는 언어와 사고방식은 법정에서 절대 통하지 않는다.
특히 객관적으로 법원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관과 의뢰인 가정의 사고방식이 너무 차이가 나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놀랍게도 눈 뜨자마자 배우자에게 쌍욕을 퍼붓는 것이 당연한 가정도 있고, 자녀를 이새끼 저새끼로 지칭하는 것이 당연한 가정도 있고, 첫째 아들한테 전재산을 상속해주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가정도 있다. 이런 모든 비정상적인 가정의 특수성을 법원이 인정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법원에 오는 사건에 등장하는 가정의 가치관은 진짜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다. 빠른 이해를 위해 한 가지만 예를 들자면, 세상에는 상간녀한테 자기 자식에게 성관계하는 법을 가르쳐주라고 하면서 나중에 셋이 성관계를 가지자고 하는 아버지도 있다. 변호사들이 막장드라마에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법원이 최대한 그 가정의 특수성을 고려해도 객관적인 현실과 도덕적 가치관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판결이 의뢰인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예를 들어 배우자한테 단 한 푼의 재산분할도 해줄 수 없다는 의뢰인은 결코 맘에 드는 판결을 받을 수 없다.). 현실과 자기 가정의 특수성의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는 의뢰인들이 꼭 결과가 맘에 안 들 때 변호사 탓을 한다. 변호사를 잘못 선임해서 졌다부터 시작해서 온갖 모욕적인 말을 다 하는데(그런 모욕적인 말들은 굳이 적지 않겠다.) 이 지구 상에 있는 어떤 변호사를 데리고 와도 '야!'라고 하는 말을 폭언으로 인정받을 수는 없다. 장조림을 통조림이라고 부르자고 혼자 백날 외쳐봤자 국어사전에 등재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재판장님, 이 사건은 피고인이 장조림인지 통조림인지 불분명하여 피고인의 특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설령 단순 오기에 불과하여 피고인 장조림에게 이 사건 공소의 효력이 미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로 피고인이 계란 장조림인지 소고기 장조림인지 불분명하여 피고인의 특정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소기각 판결을 하여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