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가 있다면 맛있는죄뿐입니다
따끈한 밥에 스팸 한 조각!
광고문구만 들어도 밥 생각이 절로 난다. 밥 안 먹는다고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아이들도 식탁으로 앉게 만드는 마성의 밥도둑, 바로 스팸이다. 스팸은 그냥 구워 먹어도 맛있고, 계란물 입혀서 구워도 맛있고, 쫑쫑 썰어서 볶음밥 해 먹어도 맛있고, 구워서 샌드위치에 넣어먹어도 맛있고, 칼집을 내고 에어프라이어에 돌려서 썰어먹어도 맛있고, 부대찌개에 넣어 먹어도 맛있고, 김치찌개에 넣어도 맛있고, 떡볶이에 넣어도 맛있고, 김밥에 넣어 먹어도 맛있고, 주먹밥에 넣어도 맛있고, 아무튼 무슨 짓을 해도 맛있다.
먹는 것은 좋은 식재료로 잘 먹어야 한다는 고집 아래 우리 부모님은 스팸 같은 캔햄류를 우리 세 남매한테 잘 사주지 않았다. 물론 너비아니나 미트볼, 용가리 치킨 같은 가공식품류는 매우 자주 먹었는데 유독 스팸은 잘 안 먹었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어릴 땐 유독 TV에서 스팸 광고만 보면 엄청 먹고 싶었다. 하얀 밥 위에 스팸을 한 조각 척 올리는 그 광고는 진짜 미쳤다. 마치 척수반사처럼 내 의도나 허기짐의 정도와 관계없이 밥을 먹고 싶어 진다.
그래도 우리 세 남매가 다 성인이 된 뒤에는 부모님의 스팸제한정책이 완화되었다. 본가에 놀러 갈 때마다 엄마가 해주는 요리가 꼬마김밥(줄여서 '꼬김'이라고 부른다)인데, 그 속에는 스팸이 들어있다. 가족들이 다 엄청 좋아한다. 정신 안 차리고 막 먹으면 앉은자리에서 다 집어먹을 수 있을 정도로 엄청 맛있는데, 최근에 엄마가 건강관리 차원에서 야채를 왕창 섭취하고 가공육을 안 먹기 시작하면서 꼬마김밥도 속에 참치가 들어가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참치가 들어간 것도 엄청 맛있긴 한데, 스팸의 그 짭쪼롬한 맛이 생각나서 좀 아쉽긴 하다.
스팸은 해외에서는 저가의 싸구려 햄 정도로 취급된다. 스팸 최대 소비국가인 미국에서도 스팸무스비(마저도 일본인들이 만든 음식으로 주로 하와이에서 먹는다.)나 스팸튀김 외에는 특별히 스팸으로 만든 요리가 없다. 우리나라에 스팸이 많이 알려진 것은 미군부대에서 먹고 남는 식재료로 부대찌개를 끓여먹으면서였는데, 가난해서 먹을 것이 없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별미였던 스팸이 미군에겐 그냥 늘 버려지는 싸구려 전투식량이었다. 짜증 나는 광고메일 등에 '스팸'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것도 2차 세계대전 동안 스팸의 과잉공급에 지겨워진 사람들을 겨냥하여 '스팸'에 '원치 않는 과잉공급'이라는 뉘앙스를 담아 개그 소재로 썼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겐 스팸이 정말 스팸처럼 느껴질 지라도 나한테만 맛있으면 그만이다. 한국인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깨달았다. 한국인들의 스팸 사랑은 대단하다. 전 세계에서 미국 다음으로 많은 스팸을 소비한다. 한국에서 미국 스팸 소비량의 절반 정도를 소비한다고 하는데, 인구수를 감안하면 정말 엄청난 양이다. 선물세트로까지 스팸을 주고받는데, 외국인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의아해한다고 하지만 사실 놀랄 것도 없다. 왜냐면 스팸은 정말 맛있고, 한국인들은 스팸을 활용한 온갖 무궁무진한 음식을 다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부턴가 비싼 것을 소비하는 것이 행복의 기준이 되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진으로 말하는 SNS가 유행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진 한 장으로 남에게 보여주기 쉬운 소비를 중심으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을 말한다. '다들 명품 사는데 나만 못 산다', '다들 외제차 사던데 나만 아반떼 탄다'와 같은 한탄이 늘 나온다. 예로부터 사람은 남들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불행을 말해왔지만, 요즘은 인터넷 때문에 남들을 눈으로 보는 것이 더 쉬워지면서 더 괴로워하는 것 같다.
실제로 명품 소비도 엄청 늘었다. 재산분할 목록 작성할 때 명품 가격을 찾아보는 것도 변호사의 일이 되었다. 상대방이 명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상대방이 인스타에 올린 자랑용 사진을 증거자료로 제출하면서 중고 거래 시가를 찾아서 같이 제출하는데, 그런 재산목록을 작성하고 있으면 뭔가 자괴감이 든다. 세상에 파텍필립을 차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값비싼 소비만이 행복의 조건은 아니다. 스팸처럼 싸구려라고 외면받는 식재료도 다양한 요리법을 만나면 훌륭한 밥도둑이 된다. 비싼 투쁠 한우가 물론 맛있기야 하지만, 그래도 변함없이 식탁에 늘 올라가는 맛있는 반찬은 스팸이다. 소비를 조장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것의 기쁨을 종종 잊는 것 같다. 삶을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은 그냥 따끈한 밥 위에 스팸 한 조각 같은, 일상 속에서 늘 느낄 수 있는 소소한 기쁨들인데 말이다.
누군가에게서 들은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한 마디, 엄마가 해준 꼬마김밥, 친구들이랑 하염없이 나누는 수다, 미세먼지 없는 맑은 하늘, 퇴근하고 한 잔 마시는 술. 그런 것들이 모여서 행복한 하루를 만드는 것이다. 스팸은 요리하기 나름이듯, 행복도 찾기 나름이다.
재판장님, 피고인 스팸은 그저 맛이 있어서 밥상에 자주 오르게 되었을 뿐이며 본래 밥반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기에 밥을 절취하고자 하는 불법영득의사가 전혀 없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범행의 고의가 인정될 수 없으며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