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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갱도요새 Jul 07. 2021

제육볶음은 술도둑

아빠랑 술친구가 된 이야기

학부시절 동아리방에서 "언젠가 공대 옆에 제육볶음과 돈까스에 소주랑 맥주만 파는 음식점을 차려서 개부자가 될 거다."라고 말했더니 동아리방에 있던 남자들이 너도나도 투자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하지 못해서 아직 개부자가 되진 못했지만 제육볶음은 여전히 남자들의 소울밥도둑이다.


내가 제육볶음을 제일 많이 먹었던 건 고등학생 때다. 나의 모교는 앞에 하천이 흐르고 근처에 아무런 음식점도 없는 하천길 한복판에 있었다. 10분쯤 걸어가야 비로소 김밥천국이 하나 나왔다. 나는 결국 변호사가 되어버린 범생이답게 매일 자율학습을 했는데, 주말에도 나가서 자율학습을 했다. 주말엔 급식이 없었고 별다른 선택권이 없었기에 김밥천국의 모든 메뉴를 섭렵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김밥천국의 명물인 국그릇이 혼자 움직이는 마법을 감상하며 종종 제육덮밥을 시켰고, 제육과 밥의 비율을 완벽하게 조율해서 제육볶음을 다 먹을 때 밥도 딱 끝나게끔 먹는 것으로 친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지금은 밥을 반공기도 다 못 먹는데 고등학생 땐 확실히 내장기관도 어렸는지 그 밥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제육볶음은 보통 돼지고기 앞다리살을 쓴다. 간혹 뒷다리살 쓰는 집도 있는데 엄청 퍽퍽하다. 업계의 룰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대개 앞다리살을 쓰면 제육볶음이라고 부르고 뒷다리살을 쓰면 고추장불고기라고 부르는 듯하다. 유사품으로 돼지고기 두루치기도 있다. 음식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라서 자세한 차이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고추장불고기나 돼지고기 두루치기라는 이름으로는 결코 소울밥도둑이 될 수 없다. 제육볶음 같은 찰진 느낌이 없다. 


제육볶음의 가장 별미는 역시 비계 부분이다. 야들야들하니 양념이 완전 스며들어 있어서 흰쌀밥이랑 아주 찰떡이다. 가정에선 돼지비계를 떼고 조리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계는 아주 맛있고 사실 몸에도 좋다. 외국에서는 돼지기름을 '라드'라고 해서 요리할 때 풍미를 더하기 위해 많이 사용한다. BBC에서 발표한 건강한 식재료 리스트에도 pork fat이 당당히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https://www.bbc.com/future/article/20180126-the-100-most-nutritious-foods). 많이 먹으면 살로 바로 갈 테니 당연히 안 좋겠지만, 나름 비타민D도 풍부하다. 사실 비타민D를 먹을 거면 그냥 영양제를 먹는 게 나을 것 같고 그냥 맛있으니까 비계를 먹는 거다. 비계가 없으면 제육볶음을 먹을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학교 졸업한 이후엔 제육볶음을 거의 안 먹었는데 얼마 전 본가에 놀러 갔더니 아빠가 제육볶음을 사 왔다. 요즘 들어 종종 아빠랑 술을 먹는데, 그날도 술 한 잔 하자며 아빠가 맥주를 깠다. 알배기 배추에 야들야들한 제육볶음과 쌈장을 올려 냠냠 먹으면서 아빠랑 밥 대신 술을 먹었다. 왜 진작부터 아빠랑 술 먹을 생각을 못했을까. 아빠는 딸이랑 술친구가 된 것이 즐거운 눈치다. 나도 아빠가 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얘기 해주는 것이 재밌다. 약간 투머치 토커이긴 하지만 술 마실 땐 나도 신나서 얼마든지 투머치 리스너가 되어줄 수 있다. 제육볶음에 술은 진짜 미친 조합이고, 배만 부르지 않다면 얼마든지 술을 먹을 수 있다. 아빠가 제일 좋아하는 술은 막걸린데 아쉽게도 막걸리가 없어서 맥주랑 와인으로 대신했다.


나는 우리 집 세 남매 중 유일하게 아빠를 닮아서 술을 잘 먹는다. 엄마랑 동생들은 술을 한 잔만 마셔도 얼굴이 시뻘게지면서 홍익인간이 되는데, 나랑 아빠는 그냥 잘 먹는다. 주량은 서로 잘 모르겠다. 흔히 아빠랑 술 먹는다고 하면 그냥 한두 잔 먹는 것을 생각하는데, 아빠랑 나는 저번에 와인을 각 1병씩 해치우고 집에 있던 500ml 맥주캔 네 개를 다 비우고도 양주를 조금 더 먹었다. 엄마가 그만 먹으라고 말리지 않았으면 좀 더 먹었을 것 같다. 아빠는 다음 날 숙취도 거의 없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먹을 땐 멀쩡한데 다음 날 숙취로 꽤 고생하는 편이다. 


아빠는 술을 먹으면 온갖 이야기를 다해준다. 평생을 아빠랑 알고 지냈지만(?) 아빠가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해주는 건 처음 봤다. 아빠는 평소에 말하는 걸 참 좋아하지만, 본인 얘기하는 건 또 굉장히 꺼려하는 편이라 늘 관심도 없는 정치니 외국 경제니 기후변화니 하는 얘기만 해서 평소에 대화하면 정말 노잼 비문학 지문을 오디오북으로 듣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근데 술을 먹으면 그런 뜬 구름 잡는 얘길 안 하고 진짜 아빠의 이야기를 해준다.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해왔고,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그런 이야기들.



아빠는 아빠의 아빠, 그러니까 나의 할아버지를 닮아서 술을 잘 먹는 것 같다. 어릴 때 종종 할머니 집에 가있었는데, 할아버지는 늘 갑자기 전화를 받고 나가시더니 밤늦게까지 술 드시고 얼굴이 벌게져서 들어왔다. 시뻘게진 얼굴로 목소리를 엄청 크게 내면서 들어오셨는데,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기가 어려워서 되게 싫었던 기억이 난다. 할머니는 "xx아빠(우리 막내 고모 이름이 들어간다) 또 술자셨어?"라고 핀잔을 줬다. 할아버지는 집에서 반주도 즐기셨다. 무슨 술인지 모르겠지만 늘 주전자에 술을 채워서 작은 잔에 따라 혼자 홀짝이면서 드셨다. 할머니는 술을 전혀 안 드셨고, 나는 완전 어린이라 당연히 술을 못 먹었으니 할아버지는 늘 자작을 하셨다. 그게 심심하신지 가끔은 술 좀 따라달라고 하셨다. 


언제까지고 술을 드실 것 같던 할아버지도 나이를 먹으니 건강이 안 좋아지셨고, 치매로 꽤 고생을 하시다가 지난주에 패혈증으로 입원하셨다. 병원에선 1주일 정도 시간이 있다고 했고, 아빠는 장례 절차를 알아보며 심난해했다. 아빠는 어릴 때 할아버지가 싫었는데, 나이를 먹으니 비로소 이해가 되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늦게서야 할아버지한테 할아버지 살아오신 얘기를 들었다며 못내 아쉬워했다. 아빠랑 할아버지가 더 젊을 때부터 더 많은 대화를 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빠가 자기 인생을 살면서 할아버지를 이해한 게 아니라, 그냥 술 잘먹는 아빠랑 술 잘먹는 할아버지랑 술잔 기울이며 서로 이해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빠랑 더 자주 술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한테 듣고 싶은 아빠의 인생 이야기가 너무 많다.




재판장님, 피고인 제육볶음은 밥을 절취한 것이 아니라 술을 훔쳤습니다. 피고인이 평소 상습적으로 밥을 훔친 것은 사실이나 이 사건에서만큼은 밥을 훔친 사실이 없으며, 밥을 훔친 것과 술을 훔친 것은 그 범행시기나 방법이 완전히 다르고 피고인의 방어권 행사에 현저한 지장을 초래했다고 할 것입니다. 따라서 공소사실이 특정되지 않아 공소제기 자체가 무효라고 할 것이며, 공소기각을 선고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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