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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Nov 15. 2018

퇴직 후에야 비로소 배운 말 "여보, 사랑합니다"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7

아버지께서는 다니시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하시고 90년대 중반에 개인 사무실을 개업하셨다. 그리고 그 무렵 우리 사남매 중 셋은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막내 여동생만 고향인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니께서는 지난 수십 년 간 아버지의 직장 출퇴근과 그리고 우리들의 대학입시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엄청난 희생과 고생을 하셨다. 우리들이 각자의 방 청소 정도는 거들었지만 매 끼니마다 식사 준비, 집안 청소와 빨래, 다림질, 사남매의 도시락 챙기기 등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한시름 놓아 고등학생인 막내 여동생만 챙기면 됐고, 개업을 하신 아버지께서도 비교적 출퇴근이 자유로워지셔서 어머니의 수고를 한층 덜어 드리는 상황이 되었다.     


제목이 일일이 다 생각나진 않는다. 90년대 초중반 유행하던 여러 편의 TV 드라마에서 평생 청소 한번 안 도와주던 남편들이 은퇴 후에 급격히 가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 청소, 설거지 등 가사를 돕는 장면들이 자주 눈에 띄었다. 당시는 군사정권 하의 꽁꽁 얼어붙은 독재 시절에 작별을 고하고,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과 거센 민주화의 바람이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변화의 불씨를 던지던 시기였다. 


언론 보도의 자유를 비롯해 해외여행 자유화 시대가 열렸고 여성의 사회활동이 점진적으로 늘어나는 등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바람은 가정에까지 불어 닥쳐 어느 사전에 명시라도 되어 있었던 것처럼 명확하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역할에도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90년대 초 MBC TV에서 방영된 '대발이 가족'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는 가부장적인 아버지(이순재 역)의 전형을 보여주는 모습과 동시에 변화하는 시대의 아들과 남편(최민수 역)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어마어마한 시청률을 기록하는 등 국민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변화하는 시대상에 맞는 가족과 아버지의 모습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우리 집에도 예외 없이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아버지께서 집안 청소 등 가사를 도와주시는 일은 매우 드문 경우였는데 인생 2막을 시작하신 후로는 청소도 하시고, 쓰레기도 내다 버리시고, 심지어 얼마 전에 뵈니깐 빨래를 널고 개는 일까지 하신다. 


자식들에게 엄하면서도 속마음은 한없이 자상하신 아버지셨지만, 어머니께는 참 무뚝뚝하고 집안일도 웬만해선 잘 거들지 않으셨는데 마치 유명한 학원에서 마인드 변화 교육이라도 받고 오신 것처럼 완전 딴 사람이 되셨다. 아마도 인생의 동반자인 어머니에 대한 그동안의 고마움과 미안함에서 비롯된 대오각성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생 시절이던 어느 날 고향 집으로 어머니께 안부 전화를 드렸다. 이런저런 얘기가 오간 후에 갑자기 어머니께서 "요즘 아버지가 엄마한테 말을 새로 배우는 게 있다"라고 하시면서 옆에 계신 아버지께 "여보, 그동안 배우고 연습한 말 한번 해 보세요"라고 하셨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가 안 갔지만 아무튼 전화기를 귀에다 바짝 갖다 붙이고선 아버지가 하시게 될 말씀을 기다렸다. "여보, ~~~~~". 뒷부분이 잘 안 들렸다. 어머니께서 더 크게 말씀하시라고 다그치시는 목소리가 들리더니, 다시 아버지께서 "여보, 사랑~~~". 어머니께서 더 크게 하시라고 또 다그치신다. "여보, 사랑합니다!!!". 아버지가 버럭 고함을 치시듯 목소리를 높이셨다. 그제야 아버지께서 새로 배우신다는 말이 무엇인지 오롯이 알 수 있었다. 전화를 끊고서 나는 한참을 웃었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지난 세월에 대해 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은 직장에 다니는 남자가 집안일을 돕는다는 표현만 해도 질타를 받을 수 있다. 집안일은 돕는 게 아니라 원래부터가 분담해서 같이 해야 된다는 생각에서다. 맞벌이 부부가 많은 요즘의 세태에서 틀린 말이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결혼 초부터 뭔가 작은 부분이라도 분담을 해서 집사람의 수고를 덜어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지만 사실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게다가 잘못된 부분이 많은 교육 시스템과 복잡한 입시제도로 인해 학부모의 부담과 역할이 더욱 커진 시대에서 아이들을 위해 부모가 챙겨야 할 부분이 옛날보다 더 늘어났다. 


육아문제, 자식 교육문제에서부터 빨래, 청소, 분리수거 등 가사 분담이 적절히 이뤄지지 않으면 결혼 생활에 큰 문제로 번질 수도 있다. 지금으로부터 벌써 수십 년 전에 대오각성하신 아버지의 위대한 생각을 물려받아 나부터가 좀 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나도 "여보, 사랑합니다"란 말을 거의 안 해 본 것 같다. 참으로 쉬울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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