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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Nov 11. 2018

빛바랜 흑백사진 속 구멍이 숭숭 뚫린 아버지의 러닝셔츠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16

중학생이었을 때다. 남자 형제가 없고 여동생들만 있는 덕분(?)에 혼자 방을 따로 쓸 수 있었다. 대신 내가 쓰는 방엔 책장과 이불을 넣어둔 장롱이 있어서 내 책상까지 더하면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혼자 방을 쓰면서 눈치 보지 않고 카세트로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더러는 비 오는 밤에 보고 싶은 친구들에게 편지도 쓰고, 어쩌다가 집중이 잘 되는 날엔 새벽녘까지 열심히 공부도 하곤 했다.     


어느 날 학교에 다녀와서 몹시 피곤함을 느껴 저녁밥을 먹고 나서 한 시간 남짓 초저녁 잠을 잤다. 그래서인지 밤늦게까지 잠이 오질 않았고 그날따라 뭘 해도 집중도 잘 안 되었다. 그러다 호기심이 발동해서 장롱 위에 있는 상자들을 뒤져 보기로 했다. 


사실 장롱 위에 여러 개의 상자가 있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 안에 뭐가 있을지 한 번도 궁금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그 궁금증이 한꺼번에 폭발이라도 하듯 나는 들뜬 감정을 부여잡을 수가 없었다. 책상 의자를 장롱에 가져다 붙이고는 팔을 뻗어 조심스럽게 상자를 하나씩 끄집어 내렸다.  

  

상자는 모두 세 개였고, 당시의 양복점을 나타내는 'OO라사'란 상호가 쓰여 있었다. 기성복 판매가 흔치 않던 시절이라 아마도 아버지께서 양복을 맞춰 입으시는 가게인 것 같았다. 첫 번째 상자에는 아버지의 오래된 사진첩과 수첩 같은 것들이, 다른 하나는 어머니의 사진첩과 잡동사니들이, 마지막 하나는 부모님의 결혼 사진첩과 편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나는 나름 내일 아침에 일어나 등교할 것을 감안해서 하루에 하나씩 상자의 내용물들을 살펴보기로 하고 제일 먼저 부모님의 결혼 사진첩이 들어 있는 박스를 골랐다.        


흑백 사진첩에는 부모님의 결혼식 사진부터 해서 두 분이 여기저기서 찍으신 사진들이 꽂혀 있었다. 그중에서 특히 기억이 나는 것은 부모님의 결혼식 중 신랑 신부 맞절을 하는 사진이 있었는데 아버지께서 완벽한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여서 절을 하는 사진을 보고선 한 밤중에 소리를 낼 수는 없었지만 큰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상자 안에는 아버지 어머니께서 서로 주고받은 편지들이 들어 있었는데 차마 내용을 읽어볼 수는 없었다. 그렇게 첫 번째 상자의 열람은 끝이 났다.    


이튿날 학교에 다녀온 후 밤이 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나는 가족이 모두 잠든 야밤에 홀로 두 번째 상자를 열어서 아버지의 사진첩과 수첩 같은 것들을 살펴보았다. 부모님께서 결혼하시기 전에 아버지의 추억이 담긴 사진첩이었는데 그 사진첩의 사진 중에서 유난히 빛바랜 흑백 사진 한 장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왈칵 쏟았다. 


아버지의 군 복무 시절에 반팔 러닝셔츠 차림으로 여러 동료들과 같이 찍으신 사진이었는데, 다른 동료 분들의 러닝셔츠는 비교적 멀쩡한데 유독 아버지가 입고 계신 러닝셔츠에만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흑백 사진이라 흰 러닝셔츠에 난 구멍은 마치 악다구니를 부리듯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 형편이 몹시 어려워져서 고달프고 가난했던 청년 시절을 보내셨다고 들었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는 단 한 마디도 그 시절의 고난함을 내색하지 않으셨던 아버지의 마음을 알기에 한참을 소리 없이 울었다. 정작 자신의 고난했던 시절은 가슴에 묻어두고 그리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불구하고 자식들에게만큼은 늘 좋은 것, 맛난 것을 해 주시려고 애쓰시는 마음이 생각나 눈물이 쉽사리 그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겪으신 가난은 손택수 시인의 시 <아버지의 등을 밀며>에 나오는 지게 자국이셨을 것이다. 

        

나는 또 다른 사진들을 보면서 아버지께서 젊은 시절에 몇 가지 다른 직업을 가지셨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의 옛날 사진첩을 봤다는 걸 먼저 말씀드리기도 애매하고, 아버지께서도 아주 오랜 과거의 일을 굳이 내게 먼저 말씀해 주시지도 않으셔서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십여 년 전에 서울에 살고 계신 작은 아버지를 통해 우연히 내가 궁금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짐작컨대, 아버지께서 먼저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던 것은 너무 가난하고 힘들었던 시절의 일이라 자식에게 굳이 꺼내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음날 세 번째 상자 속 어머니의 사진첩에서 결혼하시기 전 어머니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 수 있었다. 직장 생활하시던 모습, 공원 같은 곳에서 야유회를 즐기시는 모습 등의 사진이 있었고, 외할머니의 젊은 시절 모습도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아 있었다. 내가 결혼한 후에 장모님의 옛날 사진을 보고 집사람과 너무 닮아서 깜짝 놀란 일이 있었는데 그 당시 외할머니의 젊으셨던 모습 속에서 어머니의 얼굴이 보였던 것도 기억에 남아 있다.    


비록 사진첩 속의 빛바랜 흑백사진들을 통해서 이지만, 그렇게 사흘 밤에 걸쳐 나 홀로 부모님의 과거로 시간 여행을 했다. 나 홀로 여행이라 부모님과의 대화는 없었지만, 부모님을 좀 더 이해하게 되었고 부모님과 나만이 아는 비밀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 상자를 열람하던 날 사진첩 외에 아버지의 수첩을 슬쩍 들여다봤는데 그 첫 장에 이런 말이 써져 있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다. 우리는 고독을 버릴 자유도 선택할 자유도 없다.
다만 고독하지 않은 채 할 뿐이다.


지금도 이 말이 아버지께서 직접 하신 말인지 아니면 어느 유명한 철학자가 한 말인지 알지 못한다. 웹 검색을 해봤는데 찾을 수가 없다. 게다가 몰래 수첩을 뒤져본 거라 아버지께 여쭤 볼 수는 더더욱 없다. 그래서인지 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리고 가슴에 참 와닿는 말이다.


얼마 전 대구 본가에 갔을 때 갑자기 그 사진첩이 생각나서 어머니께 여쭤봤더니 아직까지 일부가 남아 있었다. 이사를 두 차례 하면서 옛날 물건들을 많이 정리하신 탓인지 아버지의 흑백 사진은 찾을 수가 없었다. 한 번만 더 보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컸다. 아마 여동생들은 그 사진의 존재 여부조차 모를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젠 나만의 비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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