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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Jan 03. 2019

아버지 새벽 2시에 좀 깨워 주세요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33

나는 원래 잠이 많은 스타일이 아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까지는 평소보다 잠을 적게 자더라도 별다른 피곤함을 느끼지 않는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에 불같이 공부에 매진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는 하루 평균 4시간 30분 정도 잤다. 대학생활을 할 때는 불규칙한 수면 습관으로 인해 평균을 내기가 어렵고,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로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6시간 정도 자는 것 같다. 잠을 많이 잔다고 해서 피로가 풀리는 체질이 아니고 오히려 땀 흘리는 운동을 통해 스트레스와 피로를 푸는 것을 선호한다.


일반적으로 출생 직후에는 약 18~20시간, 소아기에는 12~14시간, 성인에게는 7~8시간, 고령자는 5~7시간의 수면시간이 필요하다고 한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평균적으로 필요한 시간보다 적게 자도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의 평균 수면 시간이 8시간 22분인데 비해 한국인의 평균 수면 시간은 7시간 41분이고, 한국 직장인의 평균 수면시간은 6시간 06분으로 OECD 회원국 중 최하위 수준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딱 한국 직장인의 평균이다. 아! 불쌍한 한국의 직장인들이여.   


중학교 1학년 때 첫 중간고사를 보고서 심한 충격을 받았다. 초등학교 시절에 받던 성적표와는 상당한 괴리가 있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방법에서부터 수면 시간까지 모든 것에 변화를 주기로 결심했다. 제일 큰 문제는 잠이었다. 남들과 똑같이 자서는 절대 지금의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없을 것이라 판단한 나는 아버지께 도움을 요청했다.   


알람용 탁상시계가 있었으나 내 몸이 줄어든 수면시간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절대 시계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나는 한 밤 중에 홀로 깨어있을 때 왠지 집중이 잘되고 공부의 능률이 올랐다. 그래서 밤 11시 정도까지 공부하다가 잠자리에 들면서 아버지께 새벽 2시에 좀 깨워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뜬금없는 아들의 부탁이었지만 아버지께서는 흔쾌히 승낙을 하시고 당장 그 날부터 내가 스스로 잠을 컨트롤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길 때까지 상당한 기간 동안 알람시계 같은 역할을 해주셨다. 요즘 알람시계는 완전히 알람 해제를 하기 전까지 5분마다 지속적으로 알람을 울리는 기능이 있는데 당시 아버지께서 손수 그 역할을 해주셨다.   


새벽 2시에 딱 깨워주시기만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잠에서 깼다가 다시 누울까 봐 10분쯤 후에 꼭 확인까지 해주셨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대단하신 자식 사랑과 정성이셨다. 한창 주무실 시간인 새벽 2시에 깨워 달라는 것도 귀찮은 일인데 10분 정도 기다렸다가 확인까지 해주셨으니 나라면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답게 말씀이 많지 않으시고 말투도 딱딱하시지만 속정은 정말 깊으신 분이란 걸 반증해주는 일화였다.       


사실 잠을 두 조각으로 나눠서 자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다행히도 내게는 잘 맞는 방법이었다. 나는 새벽 2시에 일어나서 4시 반까지 공부를 하고, 다시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자고 일어나서 등교를 하곤 했는데 습관이 몸에 밴 후에는 전혀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아버지의 정성과 나의 노력이 어우러진 탓인지 학교 성적이 꽤 가파른 속도로 올랐고 아버지의 노고를 끼치게 한 것이 헛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데 특별히 간섭을 하지 않는다. 큰 틀에서 조언할 것만 챙기고 나머지는 아이들이 자율적으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 수면시간도 마찬가지다. 잠을 줄이라든가 일찍 일어나라든가 늦게까지 공부해라든가 하는 말은 일절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큰 틀을 벗어나지 않는다면 스스로 깨닫고 계획을 세워서 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 주면서 지켜보는 타입이다.   


요즘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니 스스로 수면시간을 조절해가며 알아서 잘하는 것 같이 보여 흐뭇하다. 지금 당장의 학교 성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살아가게 될 향후 100년 가까운 시간을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잘 컨트롤해나가는 연습을 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3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내게 헌신적인 도움을 주신 것도 당장의 학업 성적보다는 아마 그런 차원의 격려와 지원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말로서는 가족들에게 잘 표현을 못하는지라 이 글을 통해서나마 그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아버지, 그때 정말 고마웠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말씀을 드리네요. 그때 진즉에 했어야 했는데 너무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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