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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Jan 06. 2019

아버지 등산배낭 메고 유럽 배낭여행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34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로 나가는 인구가 한 해 10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여행사가 생겨났고 다양하다 못해 기발한 여행 상품이 등장했다. 요즘은 인터넷의 발달로 인해 목적하는 여행지에 대한 정보 획득뿐만 아니라 숙소 예약, 항공기 예약 등 굳이 여행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손쉽게 해결이 가능하다.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면 현지의 근사한 집에서 로컬 문화를 만끽하며 여행을 즐길 수도 있다. 이탈리아나 프랑스의 한적한 지방도시에 위치한 유럽풍의 시골집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면서 힐링하는 휴가를 상상해 보시라.  


연령 제한 등이 폐지된 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는 1989년에 이루어졌다. 한정된 숫자였던 여행사가 급격히 늘어났고 단체여행에 국한되었던 여행 상품이 다양화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부터 배낭여행 상품이 본격적으로 성행하면서 모든 대학생들의 로망이 되었다.    


지금은 배낭여행이라고 해도 실제로 배낭을 메고 다니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이 가볍고 튼튼하고 바퀴까지 달린 캐리어를 사용한다. 그렇지만 1990년대에 열풍이 불었던 젊은이들의 배낭여행에서는 말 그대로 배낭을 메고 세계 각지를 여행했다.


나는 대학교 친구 2명, 고등학교 친구 1명과 같이 4명이서 한 팀을 짜서 1994년 6월 말부터 8월 초에 걸쳐 여름방학을 이용해 30여 일 간의 유럽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당시 나와 여동생들까지 대학생이 세 명이나 되는 등 집안 사정이 넉넉지 못했지만, 아버지께서 통 큰 결정으로 허락을 해주셨고 여행에 필요한 경비도 상당 부분 도움을 주셨다. 물론 내가 몇 달간 아르바이트를 통해 비축해 놓았던 자금까지도 몽땅 끌어다 넣었지만 사실 아버지께서 반대를 하셨다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친구들이 이용했던 여행상품은 'KISES'라는 학생 전문 여행사에서 내놓은 '유럽 배낭여행, 따로 또 같이'라는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여행 가이드가 따로 없는 자유여행이지만 사전에 유럽 각 도시의 유스호스텔이 예약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항공편 출발 날짜가 같은 여행자들은 따로따로 자유여행을 하지만 정해진 숙소에서는 만나게 된다. 그리고 유스호스텔에서 만날 때마다 현재 머무르고 있는 도시의 여행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구글링 몇 분이면 모든 게 해결되는 지금의 여행 상황과는 많이 달랐던 시절이다.


여행에 필요한 배낭은 아버지의 등산배낭을 빌렸다. 코오롱에서 만든 제품이었는데 푸른색과 빨간색이 조화를 이룬 디자인도 괜찮았고 무엇보다 한 달 넘는 여행 기간 동안 필요한 물품들을 넣을 수 있을 만큼 크기가 적당했다.   


군에서 제대할 때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하게 지냈던 하사관으로부터 막 새로 나온 얼룩무늬 야전상의를 선물로 받았는데 여행 중에 비가 오거나 기온이 떨어지거나 할 때를 대비해 챙겨갔다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역시 아버지께서 유용하게 쓰일 거라며 빌려주신 등산용 다용도 칼(일명 맥가이버 칼)도 정말 다양한 용도로 도움이 되었다. 캔이나 병뚜껑을 열 때, 딱딱한 빵을 썰어서 나눌 때, 잼이나 버터 같은 것을 빵에 바를 때 등등.  


1994년만 하더라도 휴대폰도 없었고, 대학생 신분으로는 신용카드 발급도 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현지에서 돈이 떨어져서 곤란을 겪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 친구들과 같이 삼사일에 한 번씩은 쓴 경비와 남은 예산을 체크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박물관 입장료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 비쌌고, 맥도널드 가격도 한국에 비해 비쌌고, 특히 생수를 별도로 돈을 주고 사마시다 보니 다른 부분들의 비용을 아껴야만 했다.


고육지책으로 부모님께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했다. 여행 경비를 아끼려는 탓도 있었지만 시차가 있다 보니 전화를 할 수 있는 타이밍이 잘 맞지 않았다. 마침 시간이 허락해 독일 베를린에서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는데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1994년 여름은 유난스럽게 더웠다. 대구는 낮 기온이 40도를 넘나들었으며 밤에도 한 달 가까이 열대야가 이어졌던 모양이다. 2018년 여름이 기상 관측 이래 제일 더웠다는 얘기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서 많이 보도되었는데 그때 비교가 많이 되었던 해가 바로 1994년이다.   


어머니께서는 이국만리에서 오랜만에 걸려온 아들의 전화를 너무 더우신 나머지 전화기를 귀에 대고 있기만 해도 덥다고 하시면서 미처 내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먼저 전화를 끊으셨다. 심지어 베를린 낮 기온이 40도가 넘는다고 하니깐 그래도 대구가 훨씬 더 덥다고 역정까지 내셨다. 얼마나 더우셨으면 그러셨을까.           


한 달이 넘게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하면서도 부모님과 여동생들을 위한 선물을 제대로 사지도 못했다. 빠듯한 여행 경비 탓으로 돌리긴 했지만 혼자만 여행을 나온 미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그나마 몇몇 준비한 선물 중에 가장 신경을 쓴 것은 아버지께 드릴 스위스제 다용도 칼이었다. 비싼 것은 아니었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아버지의 영문 이름을 직접 새겨서 선물로 드렸다. 아버지께서는 선물을 받으시고 마음에 들어 하셨다.   


유럽 배낭여행을 무사히 마치고 귀국해서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더니 아버지께서 이번 여행을 통해 느낀 점을 얘기해 보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행을 통해 세상을 대하는 시야가 부쩍 넓어진 점, 글로벌 시대에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점,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여행을 보내주셨으니 앞으로 학업에 더욱 정진하겠다는 점 등을 말씀드렸다. 솔직히 여동생들에게는 당시 말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정말로 미안했다. 여동생들도 배낭여행을 무척이나 가고 싶어 했을 텐데 말이다.



입에 맞지 않는 음식 등을 이유로 아버지께서 해외여행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같이 모시고 여행을 간 적이 한 번도 없다. 부모님과는 지금까지 줄곧 국내 여행만 함께 했었다. 그렇지만 나는 결혼 후 가족들과 같이 자주도 아니고, 길게도 아니지만 가끔씩 해외여행을 한다. 지난해에도 일본 오사카로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아이들이 나를 닮아서인지 여행을 좋아하고 즐긴다. 여진이와 지훈이가 대학생이 되면 분명 배낭여행 얘기를 꺼낼 것이다. 나는 엄청난 무리가 되지 않는 한 견문을 넓히고 경험을 쌓는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할 것이다. 다만, 아이들이 여행이 주는 의미에 대해 이 것만은 염두에 두었으면 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법>에 나오는 말의 인용으로 대신한다.

내가 멕시코에서 겪은 피곤은 멕시코 밖에서 얻어낼 수 없는 종류의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멕시코에 오지 않고서는, 멕시코의 공기를 들여 마시고 멕시코 땅을 발로 밟지 않고서는 얻어낼 수가 없는 그런 피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피곤을 거듭 받아들일 때마다 나는 조금씩 멕시코라는 나라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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