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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Nov 25. 2018

어릴 적 살던 마당이 있는 집 그리고 아파트 이사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20

내가 일곱 살 때 대구시 수성구 범어동 새 집으로 이사를 했다. 마을 전체의 모양이 물고기가 물에 떠 있는 모양이라고 해서 예로부터 범어동(泛魚洞)이란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사하던 날 익숙한 동네가 아니라 낯설긴 했지만 이층으로 된 새 집이 생겼다며 눈 오는 날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동생들과 같이 기뻐서 들떴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수성구 일대는 현재 서울의 강남구처럼 다수의 유명 학교와 학원가가 자리를 잡고 있는 대구의 핵심지역 중 하나가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시내 중심가를 벗어난 변두리 지역이었다. 집 뒤쪽으로는 나지막한 야산이 있었고 동네를 조금만 벗어나면 논밭이 꽤나 많았다. 


벌써 몇 해 전부터 상전벽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초대형의 높은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섰지만, 그땐 시골에서나 볼 수 있는 다소 정겨운 풍경이 동네 주변에 펼쳐져 있었다. 특히 아파트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동네 주변에 아파트가 생긴 건 이사 온 후에도 사오 년 정도가 지나서였다. 그것마저도 5층 높이의 아파트였다.


우리 가족이 이사한 집은 새로 조성된 택지에 미리 계획된 규모로 들어선 연립주택이었는데 거의 똑같은 모습을 지닌 집 수십여 채가 하나의 작은 동네를 이루면서 벽돌 담을 맞대고 붙어 있었다. 우리 집은 '대구주택 27호'였는데, 누구를 가리켜 부를 때 앞에다가 집 호수를 붙여서 불렀던 기억이 난다. 예를 들면 16호 집 아주머니, 14호 집 둘째 아들처럼 말이다. 


특히 16호 집 아주머니는 내가 큰엄마라고 불렀을 만큼 나에게 잘해 주셨고 어머니와 친자매처럼 가깝게 지내셨는데 음식 솜씨가 탁월하셔서 가끔씩 어머니께서 배워 오시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소풍을 가는 날에 큰엄마가 몇 번 김밥을 싸주셨던 기억이 난다. 너무나 정이 많으신 분이셨다.


연립주택에는 약간의 크기 차이가 있지만 각 집마다 마당이 있었다. 우리 집의 마당이 평수로 따지면 얼마나 될지 정확힌 모르겠지만 아마 열다섯 평 남짓 되었나 보다. 아버지께서는 마당에 모과나무, 석류나무, 무궁화, 목련 등 여러 나무를 심으셨고 작은 화단도 만들어서 매년 봄마다 다양한 종류의 꽃을 피우는 식물을 심으셨다. 


어릴 때 아버지와 같이 나무를 심고 꽃을 사 와서 화단을 가꾸는 일이 마냥 좋았고 거의 매일 마당의 나무와 꽃에 물을 주는 것 또한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고무호스와 물 조리개를 이용해 한바탕 물을 뿌리고 나면 내 가슴이 뻥 뚫리듯 시원함을 느꼈다. 


마당 한 편에 아버지께서 작은 그네를 마련해 주셨는데 어릴 적 동생들과 그네를 타고 놀기도 하고 그네에 앉아서 책도 읽곤 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파트 거주 문화에 익숙해져 있는 아이들에게 마당과 그네 이야기를 들려주면 아마도 깜짝 놀랄 것이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생기면서 동네 여기저기, 동네를 조금 벗어난 지역까지 두루 섭렵해 나가기 시작했다. 또래 친구들과 별별 장난을 다하면서 놀았는데 당시 건축 공사가 주변에 계속 있어서 공사장 인부들께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벽돌과 모래는 마치 지금의 레고 블록과 점토처럼 우리에겐 늘 최고의 놀이도구였다. 


다만 공사장 인근에서 벽돌에 손을 찧었거나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는 상처 때문에 어머니께 자주 혼이 났다. 당시 어머니는 상처가 빨리 아문다고 하시면서 빨간 약 대신에 요오드 성분이 강한 자주색 액체 성분의 약을 잔뜩 발라주셨는데 나는 그 색깔이 맘에 안 들고 남 보기에 부끄러워서 그다지 실효성(?)도 없는 저항을 하기도 했다.


동네 뒤쪽 야산과 근처 연못에서 메뚜기와 개구리를 잡아 모닥불에 구워 먹기도 했는데 지금이야 상상도 하기 힘들지만 그땐 환경오염도 없었을뿐더러 달리 간식거리가 마땅찮은 아이들에겐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한 번은 개울에서 도롱뇽 알을 건져서 부화시킨다고 양동이 같은 것에 담아 집에 가져왔다가 연탄을 쌓아둔 곳에 쏟는 바람에 혼이 났다. 사실 연탄을 쌓아둔 창고 한쪽 구석은 딱지, 구슬 등 내 보물을 숨겨놓는 비밀공간이었는데 도롱뇽 알 사건이 발단이 되어 내린 어머니의 긴급조치로 인해 전면 폐쇄되었다.


야트막한 동네 뒷산에는 등산로가 나 있어서 이른 아침에 운동을 하러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나도 부모님과 같이 즐겨 뒷산에 올랐다. 나중엔 간단한 체육시설과 운동기구가 비치되어 더 많은 사람들이 꽤나 멀리서도 찾아왔다. 


사실 꼭대기라고 말할 것도 없는 산 정상이었지만 그땐 높은 건물이 없었던지라 이른 아침에 나름 동쪽 하늘의 일출을 바라볼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다. 그때부터 몸에 밴 습관이 지금의 나로 하여금 틈날 때마다 한강공원에 나가 운동을 하게 만드는 동인인 것 같다. 어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잠깐이라도 나와 같이 산에 올라갔다 오시는 걸 좋아하셨는데 친구들과 놀기 바빠 더 자주 같이 못 해 드린 게 이제야 후회로 남는다.


중학교 시절엔 이층에 있는 방을 혼자 썼는데 방 앞에 작은 베란다가 있었다. 나는 날씨가 맑은 날에는 학교에 다녀온 후에 베란다에 나가 나무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서쪽 하늘의 붉게 물든 노을과 석양을 바라보며 시시콜콜한 감상에 빠지는 것을 즐겼다. 그리고 가끔은 긴 여름 해를 뒤로 하고 퇴근해서 동네 언덕길을 올라오시는 아버지께 손을 흔들기도 했는데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에 아버지께서 흐뭇해하시곤 했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아버지께서는 가족회의 석상에서 여러 이유를 들면서 아파트로의 이사를 공식적으로(?) 발표하셨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다. 이사한 아파트는 새로 지은 것이라 시설도 깔끔하고 좋았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게 뭔가 연립주택에 살 때와는 사뭇 색다른 느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파트 생활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부모님은 그 이후로 한 번 더 지금의 아파트로 옮기셨고 우리 사남매는 모두 결혼 후 서울에서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다. 아파트 거주가 훨씬 편리하고 장점도 많지만 솔직히 재미도 낭만도 없다. 비록 작더라도 마당이 있는 집에서 나무와 꽃에 물도 주고, 가을엔 낙엽을 모아서 태우는 냄새도 좀 맡아보고, 장맛비가 쏟아지는 여름밤에 창문 너머로 빗소리도 들어보고 하는 운치와 정감이 못내 아쉽다. 점점 디지털화되어가는 세상이지만 아날로그로밖에 남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향수가 더 짙어져 가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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