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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Dec 01. 2018

두 번의 오른손 깁스와 어머니의 정성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21

중학교 3학년 때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가 오른손 새끼손가락 부위에 골절상을 입었다. 하필이면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시험의 일부인 체력장을 한 달여 앞둔 때라 어머니의 무지무지한 잔소리를 들었다.


아버지 후배 분이 원장으로 계시는 정형외과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뼈가 완전히 부러진 것은 아니고 실금이 갔다고 한다. 일단 손가락과 팔목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오른손에 깁스를 했고, 4주 후에 경과가 좋으면 깁스를 풀기로 했다.


실금이 간 뼈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겠지만 문제는 코앞으로 다가온 체력장 시험이다. 당시 200점 만점인 고등학교 입시에서 체력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20점이었다. 턱걸이, 윗몸일으키기, 100미터 달리기, 제자리멀리뛰기, 멀리 던지기, 1000미터 달리기 등 모두 여섯 종목이었다. 나름 운동을 잘하는 편인 나는 평소 1000미터 달리기를 제외한 종목만으로도 여유 있게 1등급 점수(80점 이상) 획득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오른손 깁스로 인해 갑자기 빨간 불이 켜졌다.


4주 후에 깁스를 풀지 못할 경우엔 최소한 턱걸이와 멀리 던지기가 불가능할 것이고 윗몸일으키기를 비롯한 나머지 종목들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다. 그럴 경우엔 자칫 1등급 확보가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사실 점수도 점수지만 깁스한 상태로 100미터, 1000미터 달리기를 는 내 모습 자체가 우스꽝스럽게 생각되었다.


당장은 다친 부위의 보호를 위해서 턱걸이를 할 수 없고 멀리 던지기에도 지장을 주겠지만, 그래도 깁스를 풀 경우에는 나머지 종목에서 점수를 잘 획득하면 1등급 점수 확보는 가능할 듯 보였다. 이제 최대 관건은 4주 후에 어떻게든 오른손의 깁스를 풀어야만 했다.


병원을 나서자마자 어머니께서는 뼈 다친 데 좋다는 약과 음식을 여기저기서 구해다 주셨다. 나는 반드시 4주 후에 깁스를 푼다는 일념 하에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꼬박꼬박 어머니께서 챙겨주시는 쓴 약과 여러 음식들을 챙겨서 먹었다. 주로 다친 뼈를 잘 아물게 하는 데 좋은, 철분 성분이 많이 들어 있는 약과 음식이었다. 매일 마다 약을 달이고 별도의 음식을 준비하시느라 어머니께서 갖은 애를 다 쓰셨다. 장난치다 다친 손 때문에 이런 상황이 생겨서 어머니께 너무나 죄송한 마음이었다.


다행히도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공식이 통했다. 4주 후에 병원에 다시 가서 사진을 찍어봤는데 실금이 간 부분이 100% 완전하게 다 아물진 않았지만 무리한 충격을 가하지만 않으면 곧 완쾌될 만큼 빠르게 호전되었다고 했다. 나는 곧 체력장 시험이 있으니 깁스를 풀어달라고 떼를 썼고, 의사 선생님께서도 내 성화에 못 이겨 내가 원하는 대로 깁스를 풀어주셨다. 그리고 며칠 후 체력장 시험에 나섰다.


아직은 오른손을 조심해야 하는 터라 턱걸이는 철봉에 매달림과 동시에  회만 얼른 해 버리고 기본 점수 획득에 만족했다. 그리고 나머지 종목을 열심히 한 덕에 무난히 1등급 점수를 획득할 수 있었다.


한 달여 동안 깁스를 하다가 풀어서인지 팔이 훨씬 가볍고 자유로워진 느낌이었다. 그 때문에 100미터 달리기와 1000미터 달리기에서 만점을 받았다. 그다지 신경도 안 썼던 체력장에서 어렵게 점수를 따고 나니 어머니께서 애써주신 보람이 있어서 기뻤고, 새삼 건강한 몸이 얼마나 중요한 지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체력장이 끝나고도 몇 달이 지난 다음에 발생했다. 초겨울의 어느 날 아버지를 따라 팔공산 갓바위로 등산을 갔다. 내려오는 길에 살얼음이 낀 바닥에서 미끄러지면서 오른손을 땅바닥에 심하게 헛짚었다. 이전에 다쳤던 오른손 새끼손가락 부위의 고통이 심했고 순간 좋지 않은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불길한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퉁퉁 부어 오른손을 부여잡고 병원에 가서 사진을 찍어보니 지난번에 다쳤던 똑같은 부위가 심하게 골절이 되었고 상태도 매우 안 좋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내 생애 두 번째 깁스를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의사 선생님의 표정이 심각했다. 한 번 골절상을 입었던 부위를 더 크게 다쳤기 때문에 뼈가 잘 아물지 않을 수 있고, 그 경우엔 접합 수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3학년의 어린 나이라 수술이라는 말에 더럭 겁이 났다.


병원에서 이번에는 8주 간의 깁스를 권하는 바람에 나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올라가는 해의 겨울방학 내내 깁스를 하고 지냈다. 그리고 수술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또다시 어머니께 수고를 끼쳐드려야만 했다. 어머니께선 또 한 번 철분 성분이 든 약재를 비롯해 이것저것 뼈에 좋다는 음식을  챙겨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평생 깁스를 한 번도 안 해 본 사람도 많을 텐데 한 해에 같은 부위를 두 번이나 깁스를 한 내 운명도 참 기구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시고 보살펴주신 어머니의 심정은 또 오죽하셨을까. 아무튼 나는 어머니의 도움에 힘입어 8주 동안의 기간을 그야말로 착실하게 잘 견뎌냈다. 그리마침내 의사 선생님의 최종 확인을 받고 나서 지긋지긋했던 깁스를 벗어던질 수 있었다.    


몇 년 전에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둘째 지훈이가 롤러 보드를 타다가 크게 넘어져서 손목 복합 골절상을 입는 바람에 수술까지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놀랐던 마음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지훈이가 수술 들어가기 직전에 죄송하다는 얘기를 꺼냈는데 정말이지 마음이 너무 아팠다.


수술실 밖에서 기다리면서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수술이 잘 되기를 내 대학 입시 합격 발표 때보다 더 간절하게 기도했다. 기도 중에 문득 수십 년 전에 내가 친구들과 장난을 치다 깁스를 한 일이 떠올랐다. 당시에 나도 어머니께 매우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는데 내가 부모가 되어 다친 자식을 바라보고 있자니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을 조금 더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다친 정도의 차이를 떠나 그때의 내 어머니도 같은 마음이셨을 것이다.


지훈이는 다행히 수술도 잘 됐고, 회복도 잘 되어서 지금은 아무런 이상 없이 생활하고 있다. 애들이 공부 잘하는 것도 좋지만 안 아프고 건강하게 잘 자라 주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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