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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Dec 30. 2018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지만 둘째는 아들이어야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30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아들 딸 구분 말고 둘만 낳아 잘 키우자'란 표어가 관공서를 비롯한 여기저기에 붙어 있었다.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폭발적인 인구 증가에 따른 인구 과잉을 우려한 말이다.


그런데 불과 30여 년 만에 대한민국은 지속적인 출산율 감소로 인해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2021년을 기준으로 출산율은 가임 여성 1명당 0.81명이라고 한다. OECD 회원국 평균이 1.6명이라고 하니 차이가 꽤나 크다.


정부 차원에서 여러 가지 정책을 만들고 추진 중이지만 그다지 신통하지 못한 것 같다. 단순히 결혼과 출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취업률, 결혼에 대한 가치관, 사교육 제도 등 사회 전반적인 제도 및 현상과 맞물려 있는 복잡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1998년 12월 어느 날 직장 동료들과 점심식사를 하고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집사람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방금 전 병원에 다녀왔는데 아기가 생겼다고 했다. 내가 아빠가 된다는 말을 들으니 갑자기 주변 세상이 환해지면서 이전과는 뭔지 모르게 달라 보였다. 기쁘기도 했지만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책임감이란 단어가 떠오르기도 했다. 내 부모님께서 머잖아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신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부모님께 소식을 알려 드리니 무척 기뻐하셨고 집사람을 잘 챙기라는 당부의 말씀을 몇 차례나 되풀이하셨다.


첫째 아이를 임신하기 전 태몽은 집사람이 는데 어린 새끼 사자 몇 마리가 우리 집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집사람은 입덧 때문에 약간 고생을 하기도 했지만 첫째 아이를 낳기 전까지 비교적 무난하고 무탈하게 보냈다. 그리고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은 날 병원에 검진을 받으러 갔다가 "살림 밑천이 생겨서 좋으시겠다"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첫째 아이가 딸일 것 같다는 소식을 접한 나는 또 한 번 뛸 듯이 기뻤다. 내심 첫 아이는 애교 많고 사랑스러운 예쁜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딸내미는 1999년 9월 14일 오전 10시 즈음 태어났다. 나는 정말 억울하게도 딸내미가 세상에 나온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초산이다 보니 예정 분만일을 넘겨서 하루 전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내가 유도 분만실에서 밤을 지새우고 다음날 잠시 집에 들렀다 온 사이에 아기가 나온 것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첫 딸 여진이가 태어났고 백일과 돌잔치도 잘 치르고 건강하게 무럭무럭 잘 자랐다.  


이 년 여의 시간이 흐르면서 부모님께로부터 슬슬 둘째 아이에 대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부부는 애당초 아이를 하나만 낳을 생각은 없었고, 아이가 혼자서는 나중에 자라서도 외로울 수 있으니 아들 딸 구분 말고 딱 둘만 낳기로 결혼 초부터 계획을 했었다.


문제는 부모님이었다. 어쨌든 부모님 세대는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서라도 손자를 보시고 싶은 생각이 강하셨고, 부모님의 그런 생각은 은연중에 우리 부부에겐 살짝 부담으로 다가왔다. 특히 나는 둘째가 딸이어도 전혀 상관없다고 집사람을 안심시켰지만, 집사람은 며느리 된 입장에서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 않은 것 같아 보였다.


그러던 중에 어머니께서 집사람에게 꼭 가보라며 김천에 위치한 용하다고 소문난 한약방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한약을 지어먹고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만류했지만, 결과가 어떻게 되든 과정에서라도 최선을 다하고픈 집사람은 결국 김천까지 내려가 거기서 지어준 한약을 먹었다.


둘째 녀석의 태몽은 내가 꾸었다. 평원을 달리던 호랑이 두 마리가 내 품에 뛰어드는 꿈이었는데 아직까지도 마치 방금 전에 꾼 꿈처럼 생생하다. 약의 효험이 있어서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가 없지만 어쨌든 둘째는 아들 녀석이 태어났다. 병원에서는 이번에는 출산을 며칠 앞두고 "파란색 이불을 준비하시라"라고 했다.


그런데 둘째 아이를 출산할 때에도 나는 그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 첫째 딸내미가 아직 어렸기 때문에 향후 산후조리 등을 감안해서 이번에는 고향인 대구에 내려가서 출산을 했는데 내가 병원을 착각해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타이밍을 놓쳤다. 장모께서 내가 회사 일은 펑크 내지 않고 잘하는지 걱정이라며 농담을 섞은 핀잔을 주셔서 무지 창피했던 기억이 난다.


손자를 보시게 되자 부모님, 장인 장모님 무척 기뻐하셨다. 첫째 딸내미가 태어났을 때에도 양가 어른들이 다 축하해 주셨는데 둘째 아들까지 해서 딸과 아들의 조합을 딱 맞추게 되어 온 가족이 환하게 웃었다.


직장 동료들과 친구들도 첫째 딸, 둘째 아들 조합이 가장 좋다면서 200점 부부라고 치켜세워주니 내 기분도 좋았다. 실제로도 세 살 누나인 여진이가 어린 동생 지훈이를 엄청나게 챙겼다. 여진이와 지훈이는 온 가족의 축하를 받으면서 태어나 지금까지 큰 탈 없이 잘 자라고 있다. 다른 무엇보다도 두 아이가 건강하게 잘 자라왔다는 사실 한 가지만으로도 내 가족과, 주위 친지들과, 그리고 부처님께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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