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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Feb 09. 2019

돼지저금통, 예금통장, 그리고 학창 시절의 용돈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42

현재 50~60대 연령층에겐 어릴 적 빨간색 플라스틱 돼지저금통과 얽힌 추억이 하나씩은 다 있을 것이다. 워낙에 저렴한 가격으로 대량 생산하는 제품이라 플라스틱의 품질이 그다지 좋아 보이진 않지만 나중에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를 땐 그 질김으로 인해 꽤나 애를 먹는다. 마찬가지로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았던 문구용 칼로 저금통의 배를 갈라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다 알 것이다.   


그래도 상당한 기간 동안 십원, 오십 원, 백 원짜리 동전과 채 몇 장 되지 않는 천 원권 지폐로 채워진 돼지 저금통의 배를 가르는 날은 마치 로또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렇게 모은 돈으로 플라 모델 등 평소 내 마음속 위시 리스트에 있던 것들을 사러 나가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했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저금통에 돈을 모아서 나중에 필요한 것을 사라고 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돼지 저금통과는 별개로 아주 멋있는 저금통을 선물해 주셨다. 기다란 원통 형태였는데 원의 넓이는 참치 캔보다 조금 더 넓었고, 길이는 약 30~40센티미터 정도 되었던 것 같다. 특이한 것은 원통 모양의 외부가 안경을 쓰고 콧수염까지 기른 멋진 신사의 모습으로 잘 꾸며진 저금통이었다.   


게다가 이 저금통의 핵심 장점(?)은 바닥 부분에 플라스틱 마개가 있어서 내가 정말로 용돈이 필요할 때엔 마개를 열고 동전을 빼내서 쓸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전의 돼지 저금통은 가득 차기 전까진 심리적인 이유로 해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가끔씩 몹시 아쉬울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 문제가 해소되어서 너무나도 좋았다. 그리고 굳이 어머니께 백 원만 주세요라고 요청드리지 않아도 되니 말이다.   


반대로 단점은 당시 오락실, 만화방을 자주 드나들던 나의 의지가 약해서인지 도무지 저금통에 돈이 잘 모아지지가 않았다. 정기 적금을 넣어야 할 돈을 수시 입출금 통장에 넣어뒀으니 돈일 모일 수가 있으랴.    


내가 '용돈'이라는 명목으로 부모님께 정기적으로 돈을 받아본 것은 중학교 1학년부터인 것 같다. 사실 그전까지는 뭔가 돈이 필요할 때마다 어머니께 받아서 쓰는 것으로도 불편함이 전혀 없었고 특별히 돈을 쓸 데도 없었다.   


집과 학교를 오가는 것 외엔 다른 길로 새는 일도 별로 없었고, 대개의 경우 집으로 곧장 와서 어머니께서 만들어주신 간식을 먹고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인근 공터에서 야구, 축구 등을 하고 놀았다. 그리고 큰돈은 아니지만, 부모님 친구 분들이나 친척 어른들께서 가끔 불규칙적으로 주시는 용돈을 일부는 저금통에 넣고, 일부는 가지고 있다가 요긴하게 썼다.


어머니는 설날 세뱃돈이나 추석 같은 명절에 친척 어른들로부터 받는 용돈 등 규모가 살짝 큰돈은 따로 통장에 모아 주신다면서 명절 당일 저녁에 어김없이 우리 사남매가 받은 돈의 95% 이상을 회수(?)해 가셨다. 어머니께서 사남매의 통장을 따로따로 다 만들어 주신 것은 아니지만 모두 맡아서 잘 관리해 주셨고, 입학식이나 졸업식 등 평소와는 다른 규모의 선물이나 필요한 것을 살 때마다 요긴하게 잘 사용하셨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설, 추석의 용돈을 내가 직접 관리하겠다고 어머니로부터 독립 선언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엔 매주 일요일 저녁에 아버지로부터 주 단위로 용돈을 받았다. 공부에 전념해야 할 시기라 아버지께서 주신 용돈은 등하교 때 필요한 차비, 학교 앞 분식집에서 가끔씩 사 먹는 간식비, 공부하는 데 필요한 문구 구입비 등을 빼고 나면 한 달에 한두 번 정도 내가 좋아하는 만화방에 들리기에도 빠듯했다.   


그래서 나는 버스비를 아끼려고 학교까지 걸어서 다녔다. 집에서부터 걸으면 학교까지 30~40분 정도 걸렸는데 아주 더운 날이나 추운 날, 또는 아주 피곤한 날을 제외하곤 운동 삼아 대부분 걸어서 등하교를 했다. 그렇게 조금씩 아껴서 모은 용돈으로 보고 싶은 만화책도 보고 친구들과 같이 분식집도 가곤 했다. 물론 특별한 일이 있어서 용돈이 추가로 필요한 경우엔 아버지께 사유를 말씀드리고 별도로 용돈을 받기도 했다.


대학시절엔 어머니께서 매달 통장으로 소위 '향토 장학금'을 보내 주셨는데, 부모님께서 사남매의 학창 시절을 뒷바라지하시는 상황이라 용돈이 그리 넉넉하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용돈에 보탰다. 중고교생 과외 지도를 하는 것이 가성비가 제일 좋았는데 사실 조건이 맞는 자리가 쉽게 구해지는 게 아니라서 그리 많이 하진 못했다.   


지금이야 학원가가 엄청난 규모의 산업으로까지 발달했지만, 당시 동네의 자그마한 국영수 학원에서 저녁에 중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그리고 방학 땐 이것저것 돈벌이를 경험해보고 싶은 욕심에 공사판에서 막일을 한 적도 있었는데 기술이 없어서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등 주로 힘쓰는 일만 했지만 수입은 꽤 괜찮았다. 처음 막일을 했을 때는 몸살이 날 정도로 힘들었던 때도 있었고, 어떤 날은 옷에 시멘트 반죽을 잔뜩 묻혀 와서 어머니께 심한 핀잔을 듣기도 했다.    


어머니께 배운 게 있어서 나도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이들 각자의 이름으로 통장을 만들어서 세뱃돈 등을 꼬박꼬박 적립해 주고 있다. 아이들이 중학생이 된 이후에는 미리 필요한 용돈을 충분히 떼고 나서 맡겼다. 통장에 적립한 돈은 가족 모두가 해외여행을 갈 때 일부를 꺼내서 쓰는데, 꺼낸 만큼의 돈을 내가 여행지의 로컬 화폐로 환전을 해서 직접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각자 알아서 계획을 세워서 쓰라고 했다.   


사실 저금통이든 은행 예금이든 어떻게 생각하면 조삼모사(朝三暮四) 일 수도 있지만, 평소에 불필요한 소비를 하지 않고 조금은 참을 줄 아는 습관을 들이는 교육의 한 방편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목표와 목적을 위해 돈을 아껴가며 모으는 노력이 삶의 다른 부분에도 나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다고 믿고 있다. 나도 부모님의 취지를 이해하고 잘 따랐는데 아이들도 내 취지를 받아들이고 잘 따라줘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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