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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Jan 20. 2019

워크맨 카세트, LP 음반 그리고 클래식 음악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39

아버지께서는 1990년대 초반까지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으셨다. 아버지께서 퇴근길에 손수 골라서 구입하신 LP 레코드 음반 한두 장을 손에 들고 오시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부모님이 쓰시는 방에 자그마한 전축과 턴테이블이 있었는데 시간이 허락할 때마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셨다. 나도 대학시절에 아버지를 따라서 클래식 음악에 취미를 붙여 보려고 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걸 알아차리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이제부터 영어공부는 회화 중심으로 해야 한다면서 영어회화 공부를 위한 교재들이 경쟁하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민병철 생활영어'와 '정철 생활영어'였다.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영어가 매우 중요한 세상이 될 테니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라고 하시면서 카세트테이프가 포함된 '민병철 생활영어' 교재 시리즈를 사주셨다.   


그리고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소니'에서 나온 '워크맨' 카세트도 선물해 주셨다. 지금은 '삼성'과 '엘지' 뿐만 아니라 전자제품을 제조하는 국내 강소기업들도 기술력에서 전혀 일본에 뒤처지지 않고 오히려 상당히 앞서 있는 부분도 있다. 하지만 당시 전자제품의 경쟁력은 일본이 한 발 앞서 있었고 여러 브랜드의 전자제품이 수입되어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었다. 물론 그중에서도 '소니'의 인기가 가장 높았다.


나는 아버지께 선물로 받은 워크맨 카세트에 행여나 흠이라도 생길까 봐 항상 검은색 가죽 커버를 씌워서 보물단지처럼 몸에 지니고 다녔다. 찍찍이로 여닫을 수 있고 스피커가 있는 부분만 작은 구멍이 송송 나 있는 형태의 검은색 커버였다.   


사실 그 당시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러하듯 나 역시 워크맨을 영어공부에 활용한 시간보다는, 198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마이클 잭슨,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마돈나, 라이오넬 리치, 사이먼&가펑클, 신디 로퍼 등 유명 팝 아티스트들의 테이프를 구해서 듣는데 더 많이 활용했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때 수업 중간중간의 쉬는 시간에 같은 반 친구들과 마이클 잭슨의 <Beat It>과 <Billie Jean>을 뜻도 모르고 발음도 틀리면서도 열심히 따라 불렀다. 물론 부모님께는 워크맨 카세트를 평소에는 영어공부를 하는 데 쓰고, 가끔씩 머리 식힐 때마다 음악을 듣는 걸로 잘 말씀드렸다.


중고교 시절엔 세계적으로 히트한 팝 뮤직도 즐겨 들었지만, 이문세, 들국화, 류재하, 해바라기를 비롯한 국내 가요도 즐겨 들었다. 그런데 학생 신분이다 보니 내가 듣고 싶은 가수들의 테이프를 매번 살 형편이 안돼서 여러 가수들의 인기곡만을 골라서 녹음한 테이프를 이용했다. 지금은 저작권 문제도 있고 해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당시에는 동네 레코드 음반 가게에 원하는 노래들의 리스트를 부탁하면 그리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이삼일 후에 녹음된 테이프를 받아볼 수 있었다.   


꽤 오랜 기간 동안 그렇게 하다 보니 책상에 진열된 테이프 수가 상당했다. 아버지께서 선물해주신 워크맨 카세트와 동네 레코드 가게에서 녹음한 테이프들은 그렇게 나의 학창 시절을 함께 했다. 음악을 들으면서 수학 문제를 풀기도 했고,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고, 책을 읽기도 했다.


내가 결혼을 한 직후에 아버지께서 대구에 있던 턴테이블과 LP 음반 모두를 서울 집으로 보내주셨다. LP 음반들 중에는 아버지께서 모으신 클래식 음반도 있고, 내가 틈틈이 한 장씩 사 모았던 음반들도 있다. 현재까지 잘 간직하고 있는데 지금의 집으로 이사하면서 오래된 전축을 버리는 바람에 턴테이블과 LP 음반 일부는 베란다 창고에 고이 모셔져 있다.   


언젠가 좀 넓은 집으로 이사하게 되면 꼭 턴테이블을 통해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문세'의 <그대와 영원히>를 LP 음반으로 다시 들어보고 싶다. 그리고 예전엔 비록 실패했지만,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클래식 LP 음반으로 다시 한번 클래식의 세계에 도전해보고 싶다. 비록 CD나 MP3에 비해 음질이 떨어지더라도.

  

지금은 LP음반과 카세트테이프의 시대를 지나고, CD의 시대도 지나고, MP3의 시대를 넘어 스트리밍의 시대다. 디지털 기술의 급속한 발전으로 우리가 누리는 문화의 여러 요소요소에도 변화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아날로그 방식으로 문화를 소비하는 현상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며, 미국에서는 얼마 전부터 LP 음반의 판매량이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동네 곳곳에 작은 책방들이 다시 들어서고 있다. 마니아층을 중심으로 필름 카메라의 사용도 다시 늘고 있다고 한다. 명실상부한 '아날로그의 반격'이라 칭할만하다.   


디지털 세계에서는 손으로 만져볼 수도 느낌을 확인할 수도 없는 것들이 아날로그 세계엔 실재한다. 나에게 워크맨 카세트와 노래 녹음테이프들은, 선물해 주신 아버지의 마음과 내 학창 시절의 추억이 담겨 실재하는 아날로그 세계다. 2017년 베스트셀러인 '데이비드 색스'의 저서 <아날로그의 반격>에 나오는 한 구절을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가 직면한 선택은 디지털이냐 아날로그냐가 아니다. 그런 단순한 이분법은 디지털 세상에서 우리도 모르게 사용하고 있는 언어일 뿐이다. 1이냐 0이냐, 흑이냐 백이냐, 삼성이냐 애플이냐 같은 이분법적 구분은 허구다. 실제 세상은 흑도 백도 아니고, 심지어 회색도 아니다. 현실은 다양한 색상과 수많은 질감과 켜켜이 쌓인 감정들로 이루어진다. 현실에서는 이상한 냄새가 나고 희한한 맛이 난다. 인간의 불완전함은 흠도 되지 않는다. 최고의 아이디어는 그런 복잡함에서 나오지만 디지털 기술은 그 복잡함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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