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책 읽는 습관 여든까지 간다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53

by 양성필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어릴 때부터 몸에 밴 습관은 나이가 들어서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런데 그 습관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바람직한 습관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책 읽는 습관이 바로 그 좋은 습관 중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국민들의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우리나라의 독서량은 OECD 국가들 중에 최하위 수준이라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국민 1인당 연간 영화 관람 횟수가 꾸준히 4회를 넘는 나라는 인구 35만 명의 아이슬란드를 제외하면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책을 읽어야 할 시간에 극장에 가서 영화 관람을 즐기나 보다.


나는 독서를 좋아한다. 요즘도 한 달 평균 네다섯 권 정도의 책을 사고 읽는다. 부모님께서는 우리 사남매가 어려서부터 책 읽는 습관을 기를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써 주셨다. 아버지께서 독서를 좋아하신 데다가 자식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책만큼은 정말 다양하게 많이 사다 주셨다. 그래서 우리 집에는 이런저런 종류의 책이 많았다. 고전문학 및 현대문학 전집, 그리고 어린이용 문고판 전집과 단행본, 백과사전류 등등.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사다 주신 <소년 삼국지>의 스토리에 푹 빠져 들어 중간에 책을 놓지 못하고 밤을 새우는 바람에 다음날 학교에서 하루 종일 졸았던 일도 있었다. 지금은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인 둘째 여동생은 어릴 때 계속 한쪽 방향으로 누워서 책을 읽다가 한쪽 눈만 시력이 더 나빠지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이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과 같이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 십 여 명 정도가 어른 둘을 둘러싸고 손을 들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 가보니 어른 두 분이 책과 관련한 퀴즈를 내고 맞추는 아이들에게 연필을 한 자루씩 나눠주고 있었다.


초등학교 때만 해도 독서량만큼은 꽤나 자신 있었던 나는 퀴즈 대결에 합류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 자루의 연필을 획득했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그 퀴즈 대결은 문고판 책을 팔기 위한 이벤트였고, 출판사 외판 직원이었던 아저씨 중 한 분이 나에게 "평소 책을 많이 읽는 것 같은데, 이번에 새로 나온 문고판 책 10권을 구입하면 너에게만 특별히 워키토키 장난감 무전기 한 쌍을 선물로 주겠다"라고 하셨다.


당연히(?) 새로 나온 책들은 아직 어렸던 내가 읽을 만한 수준의 책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워키토키 무전기에 눈이 먼 나는 나중에 커서 꼭 읽겠다는 약속과 함께 아버지께 적극적인 요청을 드렸고, 아버지께서는 속는 줄 아시면서도 일단 당신이 먼저 읽겠다고 하시며 내 부탁을 들어주셨다. 사실 나는 나중에 그 전집 중 한 권인가를 읽었을 뿐이다. 아버지께 죄송하다.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십여 년을 살던 연립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할 당시 버릴 책과 가져갈 책을 정리하느라 아버지와 함께 꽤나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중에 내가 결혼 후 십 년을 살았던 마포의 아파트에서 지금 용산의 아파트로 이사를 하려고 짐을 꾸리다 보니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버려야 할 책과 가져가야 할 책을 정리하느라 며칠을 보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것에 더해 약간의 장서(藏書) 욕심까지 아버지를 닮았나 보다. 요즘은 집에 일정 규모 이상의 책이 쌓이면 한 번씩 정리를 한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봤던 책들은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하고, 중고 서적을 취급하는 곳에 팔기도 한다. 내가 봤던 책들도 나중에 다시 볼 것 같지 않은 책들은 과감하게 정리를 하고 있다.


우리 나이로 팔순을 넘기신 아버지께선 이미 수십 년 전부터 일찍 주무시고 동네 뒷산으로 새벽 운동을 다니신다. 아침형 인간의 표상이라 불러 드려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일흔 살이 넘고부터는 새벽 운동 시간을 조금 뒤로 늦추시고 그 시간에 불교 서적 등 여러 종류의 책을 읽으신다고 한다. 특히 불경을 읽으시면 그렇게 마음이 편안해지고 맑아진다고 하신다. 벌써 십 년 가까이 되신 새로운 습관이다. 그래서인지 근래 아버지와 말씀을 나누다 보면 부쩍 책에 쓰인 좋은 글이나 불경의 구절을 인용하시는 일이 잦다. 최근엔 나도 아침마다 불경을 읽고 마음의 평안을 찾고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왕복 시간으로 이십 여 분씩 하는 독서는 직장생활을 시작한 이후 몸에 밴 오래된 나의 습관이다. 임원화 작가는 자신의 저서 <하루 10분 독서의 힘>에서 평소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책 읽을 시간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짧은 시간 동안 강한 효과를 체험할 수 있는 '하루 10분 몰입 독서'를 제시하고 있는데 내가 실제로 십 년 넘게 해 보니깐 좋은 것 같다.


하루 10분이면 1년에 약 7.6일에 해당한다. 이 것을 10년, 20년 계속하면 상당한 시간이 된다. 피곤한 출퇴근길에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되겠지만, 조금만 힘을 내서 이런 틈새 시간을 독서에 잘 활용하는 것 또한 삶의 지혜가 아닐까 생각한다.


어렸을 때부터 독서의 습관을 들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나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여진이와 지훈이가 어렸을 때 좋은 책들을 많이 사다 주기도 했고 어린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가 많이 읽혔다. 특히 여진이는 독서를 참 많이 했는데 딱 그 영향만은 아니겠지만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편집 반장을 할 정도로 글 솜씨가 있다.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이란 옛 말이 틀린 말이 아닌가 보다.


지훈이는 그림이 있는, 특히 만화로 그려진 책을 무척 선호했다. 삼국지도 만화로 읽었고, 특히 KBS-2TV에서 방영했던 <위기탈출 넘버원> 만화 버전 수십 권을 완전히 외우다시피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119 소방대원 못지않게 내게 설명해 주기도 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독서문화가 많이 바뀌고 있다. 아마존의 킨들 같은 e-Book 서비스가 벌써부터 등장했고, 밀리의 서재 같은 비즈니스도 생겨났다. 추천 서비스는 물론이고, 리딩북이나 오디오북처럼 책을 읽어주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단언컨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책을 읽는 맛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책을 읽으면서 연필로 비뚤비뚤 밑줄도 치고, 무엇보다 책장을 넘길 때 나는 바스락 소리, 그리고 손가락 끝에 잡히는 종이의 감촉은 감히 전자책이 주는 느낌으론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한마디로 책은 종이로 된 걸 읽어야 제 맛이 난다. 그래서 나는 종이로 된 책을 좋아하고, 좋은 작가의 책들을 밑줄 쳐 가면서 섭렵하고, 아이들에게도 권해주려고 노력한다.


독서량이 선진국임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지표인진 모르겠지만 상대적으로 앞서 있는 경제적인 지표에 비해 문화적인 지표에서 우리나라가 뒤처져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비단 독서량뿐만 아니라 평소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찾는 횟수도 낮은 수준이다. 문화적, 예술적 시선의 높이 등 사유의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최진석 교수의 저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의 내용을 요약, 인용하며 글을 마친다.

"우리나라는 철학을 수입해 왔다. 철학을 수입한다는 것은 생각을 수입한다는 뜻이다. 생각을 수입한다는 말은 우리가 수입하는 그 생각의 노선을 따라서 산다는 뜻이고, 생각의 종속은 가치관뿐 아니라 산업까지도 포함해 삶 전체의 종속을 의미한다. 지금과는 전혀 다르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 시선이 바로 인문적 시선이고 철학적 시선이고 문화적 시선이며 예술적 시선이다. 이 차원의 시선을 우리의 것으로 가져야만 '따라하기'가 '선도하기'로 바뀌고, '훈고의 습관'이 '창의의 기풍'으로 바뀔 수 있다. 시선의 높이가 생각의 높이고, 생각의 높이가 삶의 높이며, 삶의 높이가 바로 사회나 국가의 높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아버지는 늦깎이 수험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