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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성필 Feb 24. 2019

엄마 손은 약손, 어머니는 우리 집 의사 선생님

아이들과 나누고픈 내 부모님과의 추억 - Episode 47

예전에는 어린아이들이 배앓이를 할 때면 어머니가 아이의 아픈 배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져주면서 "엄마 손은 약손, 누구누구 배는 똥배"를 백 번 정도 되풀이하셨다. 그러다 보면 거짓말처럼 배 아픈  가라앉았다. 나 역시 배가 아플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 손길을 찾았고 신기하게도 어머니의 손은 매번 효과가 좋았다.


실제로 손으로 배를 지압하면 복부의 혈관이 확장돼 혈류량이 증가하고 장의 연동운동을 활발하게 해 배변활동을 돕는다고 한다. 요즘 세대의 젊은 엄마들도 "엄마 손은 약손"이라는 표현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도 집에 구비된 약이나 가까운 병원을 먼저 찾지 않을까 싶다.      


요즘은 의료보험 시스템도 잘 되어 있고, 동네에 있는 병원만 가도 좋은 시설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이라 조금만 아프거나 몸에 이상이 있으면 망설임 없이 병원으로 향한다. 그렇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웬만큼 심하게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서는 병원을 잘 가지 않는 것이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였다. 병원을 쉽게 갈 수 있을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웬만한 진료와 처방은 집에서 그것도 주로 어머니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 종합병원의 원장 선생님이자 당직 의사 선생님이고 동시에 약사이자 간호사이셨다.


일단 어떤 상처든 증상이든 어머니께 먼저 진료 상담(?)을 드리면 해결되지 않는 것이 거의 없었다. 친구들과 놀다가 넘어져서 팔꿈치 또는 무릎이 까지거나 할 경우에는 국민 상비약인 빨간약(머큐로크롬)이 어김없이 등장했다. 특히 어머니는 언젠가부터 빨간약 보다 요오드 성분이 더 강한 약을 구해서 발라 주셨다. 그 보라색 빛깔의 요오드 성분 가득한 액체 소독약을 잊을 수가 없다.


예전에는 어린아이들을 위한 약이나 연고가 시중에 많지 않기도 했고, 또 가격이 비싼 편이라 어머니는 외할머니께 전수받은 민간요법을 많이 이용하셨다. 민간요법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고 약국에서 파는 약 대신에 우리들이 평소에 먹는 식재료나 생활 도구를 이용해서 상처나 증상을 다스리는 것이다.


감기약을 대신해 어머니께서 정성 들여 끓여주신 생강차를 마시는 것, 벌레 물린 데가 심하게 가려울 때 연고를 대신해 양파나 굵은소금을 이용하는 것, 체했을 때 엄지손톱 밑을 바늘로 따는 것, 아주 심한 체기가 있을 때엔 엄지발톱 밑을 바늘로 따는 것, 설사가 났을 때 어머니가 끓여주신 매실차를 마시는 것, 여름철 땀띠가 날 때엔 복숭아를 많이 먹는 것 등이 어머니께서 내게 처방해주신 민간요법들이었다. 이 외에도 더 있을 것 같은데 일일이 다 기억이 나지는 않는다.


내가 어릴 때엔 치과에 가는 일도 쉽지가 않았다. 치통이 심한 날에는 어머니께서 아스피린을 한 알 주시면서 바로 삼키지 말고 아픈 이 사이에 넣고 물고 있으라고 하셨다. 어차피 진통제는 물과 함께 삼켜야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침에 의해 녹을 때까지 물고 있다 보니 통증 완화에 분명 효과가 있었다.


어머니께서 처방해 주신대로 따르기만 하면 분명 효험이 있었기에 나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무조건 어머니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랐다. 실제 병원에서 의사 선생님으로 근무하셨다면 틀림없이 '명의'로 소문이 나서 환자가 줄을 섰을 것이다.


썩은 이가 흔들려 뺄 때에도 어김없이 어머니의 손길을 필요로 했다. 어머니는 실로 이를 잘 둘러 묶어서 팽팽한 길이를 유지한 다음에 번개처럼 내 이마를 탁 쳐서 내 몸이 뒤로 젖혀지게 하시는 기술자셨다. 내가 다시 몸의 균형을 바로 잡고 어머니를 바라보면 미처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실에 묶인 빠진 이가 어머니의 손에 들려져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 흉내 내기 힘든 전광석화 같은 기술이었다.


첫째 여진이가 어렸을 때 내가 어머니의 기술을 따라서 해 본 적이 있었는데 이는 안 빠지고 이마만 아프다고 울어서 몹시 당황했었다. 그 이는 여진이가 혀로 계속 밀어내서 뽑혔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어렸을 적엔 빠진 이를 지붕 위에 던지는 풍습이 있었다. 윗니는 지붕 위로 던져주고, 아랫니는 아궁이에 던져줘야 새 이가 잘 난다는 오래전부터 이어져오던 전통을 따라서다.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지붕에 빠진 이를 던지면 까치가 와서 그 이를 가져가고 아이에게 새 이를 가져다준다고 한다. 도 매번 지붕 위로 빠진 이를 던지면서 까치에게 새 이를 달라고 빌었다.


점점 아파트가 늘어나고, 지붕이 있는 단독주택이 줄어들면서 이러한 풍습도 사라진 것 같다. 그 대신 요즘은 아이들이 이의 요정에게 예쁜 새 이를 달라고 기원한다고 한다. 이를 뺄 때도 당연히 집이 아닌 치과를 찾는다.


병원 약을 먹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릴 때의 경험 때문인지 나는 웬만하면 민간요법을 더 선호한다. 아주 심한 경우에만 약을 먹거나 병원을 찾는다. 그런데 아이들의 경우엔 비교적 간단한 상처나 증세가 아니라면 병원을 바로 찾는 편이다. 예전의 내 어머니만큼 진료와 처방을 해 줄 수가 없어서다. 부모님으로부터 민간요법을 제대로 전수받아서 아이들에게 십분 활용해 주면 더 좋았을 텐데 그러질 못해 아쉽기도 하다. 세상이 많이 변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가운데 자꾸 무언가를 잊고, 잃어버리고 사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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