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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양화 May 11. 2022

한국 일본 이야기 3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소수자인 교포들의 삶

6년 전 부산 다문화센터에서 (2022년 현재 ) 63세가 되는 교포 언니를 우연히 만났다. 

그녀는 나를 보고 같은 교포라며 방긋 웃으며 반갑다고 인사를 했다. 부산에서 일본인을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인데 (만나도 통일교도들이 많아서 당황함) 교포들끼리 만나기란 정말 쉽지 않다며 좋아하는 언니를 보니 신기하게도 반가운 마음과 동시에 연민의 정이 든 것은 웬일일까?


언니는 한국의 대학교로 유학을 오고 오묵파는 포장마차 주인에게 반해서 (어묵 사장이 만난 바로 그날에 프러포즈를 했다고 하는데 사실일까?) 그냥 결혼을 했다고 했다. 단발머리에 우렁찬 목소리, 결코 날씬하나고 말할 수 없는(언니 미안해) 기대고 싶어지는 몸매, 시원시원한 말투. 그녀는 10년 사귄 오래된 친구처럼 나를 대했다.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까지 시간은 전혀 걸리지 않았다.


언니는 애타게 원했던 (남자) 아이를 끝내 못 가진 아픈 마음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또 일본에서 살았을 때 언니의 아버지가 암으로 일찍 돌아가신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그 당시 1년 전에 엄마를 암으로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던 나도 엄마 그리움을 언니한테는 마음껏 토로하 수 있었다.


우리 거리는 급속히 가까워졌다. 그 속도는 너무 빨라서 나도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왜 그랬을까? 우리는 왜 서로 끌어당기는 듯이 친해졌을까?


언니는 말했다. “결국 우리는 일본에서도 소수자이고 한국에서도 소수자잖아.”

“부산에서 일본 사람을 몇 명 만나 봤는데 뭔가 역시 우리랑 달라... 결국은 그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는 소외돼.”


순간 손뼉 치고 싶었다. 맞는 말이었다. 그 느낌. 딱 와닿는다. 부산에는 일본인 며느리들의 모임이 있었다. 몇 번 그 모임에 참석해봤다. 일본인회를 이끄는 분은 오키나와현 출신의 일본 사람이었고 한 달의 한번 모이는 기회를 만들고 있었다. 함께  머그컵 만들기, 비누 만들기, 향초 만들기, 탁구 하기 등등 프로그램이 다양했다. 다들 얼굴을 보면


 “일본의 어디서 왔어?”

“지금 어디에 살고 있어?” “

"애를 몇 명 키워?”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일관계가 긴장된 시기(그때는 불매운동이 한창이었다)에는 자신의 불행한 입장을 서로 위로하고 양쪽 나라 정부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곤 했다.


그녀들은 아주 친절했다. 그러나 내 이름을 듣고 교포라는 사실을 안 순간  눈빛 속에 뭔가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려운 애매한 경계선이 엿보인다. 눈에 안 보이지만 공기가 달라진다. 이건  엉뚱한 내 상상일까? 어찌 보면 억지로 만들어낸 내 헛소리일 수도 있다. 순수 일본인 이랑 일본에서 태어난 한국사람, 이 두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만날 때... 거기에는  복잡한 관계가 형성된다.


일본에서 살 때 그녀들은 우리를 소수자로 볼 것이다. 그런 그녀들이 한국에서 소수자의 입장을 경험한 뒤에  우리(재일 교포)를 보면 어떻게 생각할까?


“일본에서 왔지만 당신들은 한국 사람이잖아?”

“우리는 여기서는 소수자이지만 당신들의 입장은 역전되었네?”


그 짧고 평범한 자기소개 속에 이런 깊이 뿌리내린 의식들이 무의식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나는 통쾌함과 싫증을 동시에 느낀다. 물론 그 순간에 이런 깊은 통찰까지 못한다. 다만 소수의 공동체 속에서도  소수의  나와 대면을 하고

“아아... 여기도 역시 내가 안주할만한 장소가 아니구나”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나는 마치 시냇물 속에 비뚤비뚤 놓여있는 미끄러운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힘없는 노인처럼 그 모임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교포 언니가 한 말이 나에게 너무 와닿았던 이유다. 


“여기서 일본 사람을 몇 명 만나 봤는데 뭔가 역시 우리랑 달라... 결국은 그 사람들 중에서도 우리는 소외돼.”


결국 교포는 일본에서도 그리고 한국에서도 그리고 한국 속에 있는 일본인회에서도 소수자 입장이다. 언니랑 나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고달픈 경험을 한 동지가 되어버린 샘이다. 



아쉽게도 내가 광주로 이사를 온 뒤  만날 수 없지만 전화기에서 언니의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놓인다. 동시에 서로의 우스운 처지에 연민도 느낀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이유다.



나는 언니를 만나서 반가웠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다. 그리고 요즘 이런 생각도 해 본다. 많지는 안겠지만 한국에도 일본 루트를 가진 사람들이 나처럼 소외감을 느끼면서 살고 있지 않을까?


복잡하고 지긋지긋한 두 나라의 역사 속에서 말없이 살아온  이들이 지금도 묵묵히 자기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분들을 응원하고 싶다. 네 마음을 안다고, 진심으로 이해한다고. 사랑해.



이런 말을 들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엄청난 '가능성'이 내 앞에 펼쳐진 듯 가슴이 벅찼다.


‘다이아몬드는 양이 적어서 귀한 것이다.’



그렇다. 소수는 소수니까 드물고 귀한 존재다. 소수자만이 이룰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학생 시절은 몰라도  사회에 한 발자국 나가면 개성이 매력으로 드러난다. 

자기의 roots를 단점이 아니라 정점으로 바꾸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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