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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 Jan 20. 2017

프라하#2 기록과 기억

Bring home a piece of Prague - 2015년, 가을

2015년 9월 24일 목요일


시차 때문일까 은근히 신경 쓰여 여기저기 불을 켜놓고 잠든 탓일까. 눈을 뜬 건 새벽 5시였다. 그래도 이것저것 정리하고 뒹굴다보니 정작 길을 나선 건 아침 8시가 넘었을 때다.


집을 나서면 광장과 가까우면서도 조용하고 또, 적당히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가 펼쳐진다. 이 길을 쭉 따라가면 구시가지 광장으로 이어진다. 광장으로 향하는 길 오른편에서 맛집으로 유명하다던 Bake Shop을 발견했다. 광장을 둘러보려던 계획은 이미 잊은 지 오래. 아무렴, 아침부터 먹어야지!


베이글이 유명한 집이라는데, 한 조각 맛보니 그냥 베이글이길래 미련없이 오믈렛을 주문했다. 따뜻하게 요리된 음식으로 속을 채우고 싶었다. 테라스에서 커피 한 잔과 담배 한 모금을 즐기는 언니 뒷모습을 보며, 난 이 정도는 먹어야 해요. 우물우물.


광장의 아침은 느리다. 산책을 즐기러 나온 사람들의 발걸음도 한결 느리고, 사진을 찍기 전 피사체를 눈에 담는 순간도 한층 더 길다.나도 느린 걸음으로 광장을 크게 한 바퀴 돌며 숨을 크게크게 뱉어본다.



시계를 보니 9시30분. 곧 사람들이 몰려들텐데 그 전에 또 뭘 하면 좋을까. 시선이 닿은 곳은 시계탑이다. 지난번엔 밑에서만 봤는데, 이번엔 저 시계탑에 올라가봐야지. 이제 여행의 시작이니, 이 정도 계단은 거뜬히 올라갈 수 있다.


발목을 돌리며 전의를 가다듬고 있는데, 이게 웬걸 엘리베이터가 있다. 아, 사랑스러운 발명품이여!! 금세 눈앞에 펼쳐진 프라하의 풍경.


밑에서 올려봤던 틴 성당과 눈높이가 나란해졌다.

 

몸을 오른쪽으로 살짝 돌면, 틴 성당 그 뒤로 화약탑 그 뒤로 송신탑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눈으로 선을, 길을 그려보며 묘한 기분에 한참을 바라본다. 저 길을 따라가면 타임워프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공간을 잇는 길이 아니라, 시간을 잇는 길이다. 다시 또 한참.


그 자리에서 좀 더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21세기의 프라하가 멀찍이 펼쳐진다.


저 멀리 보이는 프라하성. 다시 만나 반가워, 여행 후반부에 갈 테니 기다리렴.


이제 종이 울릴 시각이다. 얼른 천문시계 위로 가서 몸을 빼꼼 내밀어본다.

어느새 몰려든 사람들. 모두가 한곳을 보고 있다. 이내 종이 울린다. 지금 저 아래 천문시계에서 인형들이 등장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기억을 더듬는 동안, 역시나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리곤 나팔소리. 저 청년이 탑의 4면을 돌며 한번씩 모두 4번을 부는데, 졸졸 따라다니며 끝날 때마다 물개박수를 쳤다. 짝짝!



이번엔 엘리베이터 대신 천천히 걸어서 다시 광장으로.

방금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쩌어어기 저 위다.

 

 12시가 되면 선이 요래요래 쭉 이어져요. 자오선에서 발도장 꽝.


그렇게 사진찍느라 정신없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비눗방울이 날아들었다. 아, 어제 프라하 감동이 덜하다고 했던 건 취소해야겠다. 순간 동화 속으로, 환상 속으로 다시 빠져들었다. 사진으로는 결코 담을 수 없었던, 그 순간의 그 모습. 


다리가 아파서 잠시 앉아있으려 들어갔던 성 미쿨라셰 성당. 화려한 샹들리에가 시선을 끈다. 옆에서 샹들리에를 스케치하던 할아버지가 저건 보헤미아 왕관 모양이라고 설명해주신다. 스케치를 찍고 싶다고 하니, 완성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뜨거운 예술혼에 미안하지만 전 여기서 이만...


틴 성당 입구에 사람들이 모여있길래 뭔가 해서 가보니, 프라하에서 열리는 여러 공연 일정을 좌르륵 훑어보고 티켓까지 살 수 있는 곳이다. 어지간한 성당에선 저녁마다 음악회가 열리고, 인형극과 발레, 오페라까지 많기도 참 많다. 팜플렛 몇 개를 챙겨 다시 거리로.



걷다 보니 국립 마리오네뜨 극장 앞이다. 한글 안내판까지 있을 정도로 유명하고, 한번쯤은 볼만한 공연이겠지만 난 크게 마음이 동하지 않아 패스.


그렇게 지나치려는데 광대 아저씨들이 말을 건다. "까짓 거 뭐 어때 즐겁게 살자구" 그래 까짓 거 뭐 어떤가. 다들 본다는 인형극, 나 하나쯤 안 본들 뭐 어때.


 골목을 돌아나가니, 어흥하고 시커먼 중세의 기사가 나타났다. 다른 한 편엔 내가 더 무섭지하고 랍비(라고 하는 시커먼 형체)가 서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나즈굴과 비슷한 모양새를 실물 크기로 보니, 한낮이지만 진심 무서웠다. 포즈도 비슷하지 않은가. 어흥 대결은 랍비 win! 



맞은 편의 커다란 건물엔 IHS라고 쓰여 있다. 슬금슬금 들어가보니 한 건물이 아니라 여러 건물이 좌르륵 이어져 있다. 예수회에서 만든 일종의 복합 단지 '클레멘티눔' 이란다. 예전에 여기서 별도 관측했고, 도서관도 운영했는데, 특히 이 도서관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서관(이런 건 누가 정할까) 중 하나란다.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돌아볼 수 있고, 그 투어는 3분 후 시작!  이것은 데스티니~

투어의 첫 코스는 거울 성당이다. 내부 곳곳에 거울이 배치돼 있어, 이 거울이 저 거울을 비추고 저 거울이 그 거울을 비추는 무한 반복의 묘미가 있다. 설명에 따르면 뒤쪽 중간에 서면, 천장 거울에 바닥의 장식이 비치는데 그게 마치 하늘의 별 같아 블라블라.


두 번째 코스는 천문대. 이 각도기를 이리저리 움직여서,

 

별을 관측했블라블라~


이 사다리에 올라가서 별을 관측하다가, 또 사다리를 이렇게 저렇게 접어서 독서대로 쓰기도 했지블라~


세 번째로 드디어 도서관이다. 평소엔 햇빛이 들지 않게 암막 커튼을 쳐두는데, 투어 때만 간접조명을 켜고 그마저도 복도에서만 볼 수 있다. 이러니 사진 촬영은 절대 안 된다고. 가이드가 문을 열자 훅 하고 오래된 책냄새가 가득 밀려온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서는 찰나에 간접조명이 켜진다. 양면 가득 빼곡히 들어선 책들, 화려한 실내 장식 어느 것 하나 빠트릴 새라 눈에 새겨넣었다. 여기 있는 책들을 구글에서 볼 수 있단 설명에, 다들 신이라도 마주한 듯 탄성을 자아낸다. 이런 구글신같으니. 우리도 디지타이징 꽤 잘하고 있는데, 그 가치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쉽단 생각에 흠칫, 뭐지 이 회사 생각은!!


마지막으로 삐걱대는 나무 계단을 올라간다. 역시나 깜깜한 탑 안 어딘가. 가이드가 문을 활짝 여는 순간 빛이 들어차고, 바람이 느껴진다. 사방의 문이 열리자 아침과는 사뭇 다른 프라하 풍경이 펼쳐진다. 그냥 탑을 올라가면 아 그런가보다 하는데, 문을 닫아놓고 한순간에 열어제치니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역시 가톨릭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여야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 순간 나도 탄성을 내질렀으니깐 할 말 없지 뭐.


눈 앞 풍경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저기 저건 틴 성당.


다시 만난 프라하성. 아이 참, 우린 후반부에 보자니깐.


높은 곳에선 파노라마가 빠질 수 없지.


가이드가 끝난 후, 건물 밖으로 나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본다. 아까 올라간 곳이 저곳이구나. 가톨릭이 과학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짬짬이 강조하는 것만 빼면, 한 번쯤 권할만한 투어였다. 무엇보다 도서관은 압권이었다.


아까 본 거울 성당에서도 저녁 음악회를 연단다. 이것도 후보로 찜!



클레멘티눔을 나와 왼쪽을 보니, 이 건물 또한 심상치 않다. 사람들이 꽤 많이 드나드는데 영어 설명은 하나도 없다. 뭔가 싶어 기웃거리며 들어가봤다. 

이곳은 21세기의 프라하 도서관이다. 우연치곤 꽤 운이 좋다. 들어오길 잘 했어. 책을 잔뜩 쌓아 만든 조형물이 신기해 안을 들여다본다.


앗 5차원을 발견했다! 인터스텔라여!! 신기해서 셀카를 찰칵찰칵. 오늘 아침에 고장난 셀카봉이 어찌나 아쉽던지, 엉엉.

  

혹시나 아는 책이 있을까 싶어 쌓인 책들을 하나하나 짚어보지만 발자크만 겨우 찾았다. 아, 공부 좀 해야겠다. 내부를 좀 더 둘러보고 싶지만, 문을 열었다간 뒤에서 이미 날 경계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가 달려올 것 같아 꾹 참았다. 대신 문틈으로 훔쳐보고 있으려니, 방금 본 바로크 도서관이 떠올랐다. 일상적으로 활자를 남길 수 있는, 그것을 또 읽을 수 있는 시대에 태어나 다행이다. 특정 계급의 전유물에 머물지 않고, 누구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는 시대여서 참 다행이다.



걷다 보니 어느새 블타바 강변이다. 오늘은 이렇게 구시가지 광장 북쪽을 돌아봐야겠다 싶어 방향을 잡고 걷다보니, Marketa가 추천해준 맛집, Grosseto Marina가 눈에 띈다. 뷰가 끝내주고 가격도 착하다며 강추받은 맛집인데, 역시나 그대로다. 강변에 보트를 띄워 레스토랑으로 운영 중인 것 같았다.


블타바강과 카를교를 바라보며, 천장 유리로 내리쬐는 햇살을 그대로 받는다. 1일 1맥주는 잠시 미뤄두고, 지금은 와인이어야 해!! 웨이터 추천메뉴와 화이트와인을 제가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합격! 문득 이거 반포대교에서 파스타 먹는 사진과 비슷하겠다 싶어 혼자 웃는데, 마침 회사 언니님들로부터 반가운 라인 메시지가 두둥. 여기여기 꼭 반포대교 같죠. 근데 프라하에요.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 정면에 보이는 건물, 루돌피눔이다.


체코 필하모닉의 메인 무대, 시민회관과 더불어 프라하의 봄 축제 메인 공연장, 루돌피눔이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루돌피눔에서 체코 필하모닉의 연주를 보는 것이었다. 가을 시즌이 10월 1일부터 시작하는데, 비행기 티켓을 도무지 구할 수가 없었다. 10월 2일, 3일, 4일, 5일까지 직항 아닌 환승 포함해 죄다 대기를 걸어뒀는데 도통 자리날 기미가 안 보인다. 애꿎은 대한항공앱만 하루에도 몇 번씩 새로고침. 아 부디... 제발....


아쉬운 대로 다른 악단의 9월 프로그램이나마 체크해뒀다. 언젠가는 봄에 프라하를 찾아야지. 그래서 시민회관 스메타나홀에서 프라하의 봄 첫 무대인 <Ma Blast>를 들어야지. 그리곤 매일매일 듣고 싶은 공연을 찾아다니는 거야. 아, 언젠가는 꼭이다.



자연스럽게 다음으로 향한 곳은 유대인 지구다. 여행지에 유대인 지구가 있으면 빠트리지 않고 들르는 편이다. 끝없이 가라앉는 마음을 추스르긴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면해야 한단 생각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해선 안 될 짓이 무엇인지, '다름'을 인정하지 않을 때 무슨 비극이 벌어지는지, 소통이 왜 필요한지. 지난 과거가 말해주고 있다. 잊지 않아야 한다.


도시마다 각각 어떤 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는지 살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지점이다. 프라하 유대인 지구는 예배당인 여러 시나고그와 유대인 공동묘지로 구성돼 있다. 한 곳씩 둘러볼 생각에 통합티켓을 샀다.

벽면 가득 적혀진 글자는 당시 수용소에서 희생된 이곳 사람들의 이름이다. 그런데 기둥을 돌면 글자 가득한 벽면이 나타나고, 문을 들어서면 또다시 글자 가득한 벽면이 이어진다. 2층까지 이어진다. 많다. 너무 많은 사람이다. 너무 많은 넋이다. 읽지 못하는 글씨지만 누군가의 이름이었던 그것을 읽어보려 애써본다.


당시 아이들이 그렸다는 그림. 저 눈물방울에 부끄럽지 않게 우린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걸까.

 

독일에서 단체로 온 학생들이 눈에 띈다.


rest in peace.



마지막으로 스페인 시나고그를 나오니, 눈에 띄는 조각상 하나. 체르니의 작품, 카프카다!

저기로 가자고, 저곳으로 가야한다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그 끝엔 너? 손 끝이 닿는 곳엔 사람들이 있다. 방향을 잘 맞춰 서서 우리 마주보며 기념사진 찰칵.



이렇게 북쪽 탐험을 대강 마치고, 다시 구시가지 광장으로 향하는 길.


여기 유럽이야 하는 건물의 전형.


알고보니 명품거리다. 뱅앤울룹슨 매장에 달라붙어서 갖고 싶지 않은 것을 골라보려했으나, 결국 실패.


늦은 오후, 기분 좋은 햇살이다.



오르간의 울림을 듣고 있으면 두근거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그만큼 오르간 소리를 좋아하는데, 결국 고른 것은 클레멘티눔 거울성당의 현악 4중주다. 성 미쿨라셰 성당의 오르간 연주(그것도 헨델!!)를 포기하고 이곳으로 향한 이유는 딱 하나다.

B.Smetana - Moldau

프라하에서 스메타나를, 그것도 블타바를 들을 수 있다면? 이건 무조건 꼭 가야만 한다!! 낮에 투어를 한 덕분에 성당 구경 대신 마음을 가다듬으며 연주를 기다린다. 그리고 드디어 시작.


Moldau 연주는 솔직히 별로였다. 관현악, 그것도 장중한 교향시를 달랑 현악 4중주로 연주하니 무게감이 덜할 수밖에. 그러나 연주의 질을 떠나 프라하에서 이 곡을 듣는 것만으로도 감동이었다. 루돌피눔의 아쉬움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다. 같은 마음이었는지, 유일하게 이 곡에서 기립박수가 터져나왔다.


당황스러웠던 건 드보르작의 유모레스크 연주였다. 이 발랄하고 즐거운 선율에 왜 코끝이 찡해지는지 알 수 없었다. 뭘까 뭘까 한참 추적해봤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한'처럼  슬라브족 민족 고유의 감성인 걸까.



연주회 여운에 젖어 저녁 먹으러 가던 길.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이 너무 예뻐, 이 노을을 놓칠 순 없단 생각에 걸음을 돌렸다.

부리나케 카를교 타워에 올라가, 엽서 사진 찰칵! 지난번 여행에서 처음 만난 프라하의 모습이다. 바로 이 자리에서 저곳을 바라봤다. 감동이 덜하단 말을 아까 취소하길 잘했지. 여전히 감동이다.

 

 시끌벅적한 구시가지 광장을 지나 이제 진짜 숙소로 돌아가는 길.


앗, 오늘 아침 먹은 Bake Shop이다! 케이터링 팜플릿을 얼핏 봤는데, 이렇게 차를 끌고 나오나보다. "나 오늘 아침 거기서 먹고, 덕분에 기운 내서 종일 잘 걸어다녔어요. 이제 들어가는 길이에요. 또 만나서 반가워요." 하는 마음을 담아 사진을 찰칵.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게 뭐길래 찍는걸까 덩달아 걸음을 멈춘다. 얼른 가던 길을 가야지.



그러고보니 저녁을 안 먹었다.

멀리 가긴 싫어 대문 앞에 서서 고개만 좌우로 돌려보니, 왼쪽엔 스시 가게, 오른쪽인 피쉬앤칩스 가게다. 아니, 프라하에서 어쩜 이럴 수 있냔 말이다.


나름 '나만의 초밥왕 찾기 프로젝트'를 이어오고 있는 사람으로서, 딱 봐도 맛없어보이는 프라하의 스시집에 갈 순 없다. 결국 피쉬 앤 칩스로 결정! 1일 1맥주를 위해 이곳의 드래프트 맥주인 버드와이저 아니고 부드바이저도 한 잔 쭉쭉.


프라하에서 맞이한 두 번째 밤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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