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ng home a piece of Prague - 2015년, 가을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오늘 날씨는 어떨까. 눈을 뜨면 하늘부터 살핀다. 프라하는 이보다 더 푸를 수 없는 가을 하늘을 보여주고 있다. 하늘만 믿고 책을 한 권 챙겨 백팩을 둘러멘다. 어제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이른 시각이라 거리는 한산하다. 어딘가로 또 떠나야하는 여행객들의 돌돌돌 캐리어 소리만 이따금씩 요란하다. 골목을 꺾으면 부지런하게 조깅하는 사람들도 두어명 마주친다. 진심으로 궁금했다.
이런 움푹움푹 패인 돌바닥 위에서 어쩜 그렇게 뛸 수 있는 건가요?
발목 괜찮아요? 발바닥은요?
걷다보니 어느새 구시가지가 시작되는 동쪽 끝 무렵이다. 화약탑과 시민회관이 눈앞에 펼쳐진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여기에서부터 구시가지 광장, 그리고 프라하성까지 길이 이어진다. 그 옛날, 대관식 행렬이 지나가던 길이다.
화약탑 앞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
광장을 출발점으로 여행을 시작하는 사람들 틈에서 시민회관으로 향한다. 오늘 아침은 이곳 1층 레스토랑에서 여유롭게 즐길 계획이다.
화려한 인테리어에 일단 멈칫. 겨우 두 테이블에만 사람이 앉아있는 걸 보고 이단 멈칫. 친절한 직원이 "마담~"하며 맞아주지 않았다면 삼단 멈칫 아웃으로 타석에서 물러설 뻔 했다. 고풍스러운 내부 장식은 어쩐지 007 시리즈를 연상케 한다. 어디에선가 턱시도 빼입은 제임스 본드가 나타날 것만 같다. 오늘의 상상 속 본드는 로저 무어였다.
시민회관 안팎이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라더니, 어쩜 식당 메뉴판 표지도 무하의 그림이다. 로맨티끄가 흘러넘쳐 폭발할 지경이다. 이런 곳에서 서둘러 음식을 먹고 냉큼 일어난다는 건 장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대신 지도를 펼쳐 어제 다닌 골목을 눈으로 훑고, 오늘은 어디로 가볼까 이리저리 가늠해본다. 느긋하게.
창 너머를 보니 단체 여행 온 학생들이 두 명씩 나란히 줄을 서 있다. 오리 꽥꽥 참새 짹짹(할 나이는 지나 보였지만) 무리를 바라보길 또 잠시.
그냥 화장실 가는 계단일 뿐인데, 또 막 드라마 생각나고 말이지. 아우.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길을 나설 차례. 광장 남쪽으로 향한다.
누굴 떠올리라고 만든 건지 잘 알겠는데, 그래도 이건 좀 아니지 않나요? 나의 끌루니...T^T
카를 대학은 여러 건물을 쓰고 있다. 이렇게 멋진 도시에 캠퍼스가 없단 건 너무도 아쉽다. 도시 면적이나 골목 생김새를 보면 어쩔 수 없겠다 싶다가도, 궁전에 딸린 정원이 그토록 넓은 걸 생각하면 잘 이해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나저나 동상인 줄 알고 무심코 지나다가 깜짝 놀랐다. 아저씨, 너무 감쪽같아서 오히려 시선이 안 가요. 안타깝게도 주목을 끄는 건 실패하셨어요.
가까이에서 보고, 벽면도 만지고, 멀리서도 보니 지난 시간 켜켜이 쌓아온 아우라가 느껴진다.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초연된 극장이 이곳이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프라하 시가 모차르트에게 선물한 동상이 저 유령이다. 앞으로도 오래오래 쭉 이곳을 지켜달란 당부를 전하고 돌아서는 길. 자꾸만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무하 박물관에 들어선 순간 눈을 의심했다. 낯익은 저 뒷모습은? 어제 저녁에 도착한 회사 동기들이었다. 연락을 주고받으며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 했지만, 그뿐이었다. 무하의 '무'도 꺼낸 적 없는데, 갈 곳 많고 볼 것 많은 프라하에서, 그것도 귀퉁이에 있는 소박한 무하 박물관 안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뭐야뭐야 여기가 정자동이야 프라하야, 꺄악! 우연히 만나니 어찌나 반갑던지. 그래도 우린 각자의 여행 중이니 저녁을 기약하며 잠시 안녕.
무하 박물관은 생각보다 소박했다. <슬라브 서사시>가 없어 갸우뚱했는데, 그건 국립미술관에 있단다. 전시물이 많은 편이 아니라, 천천히 둘러보고 다큐까지 감상하고 있자니,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넌지시 알려주신다.
우체국에 가면 무하 그림을 볼 수 있는데, 여기에서 5분도 안 걸려.
정말 5분도 안 걸려 도착한 프라하 중앙 우체국은 벽면 가득 무하의 작품이었다. 왕궁이나 어느 귀족의 침실에 걸리는 그림은 비싸게 팔 수 있지만, 그보단 누구나 볼 수 있는 영화 포스터가 좋다던 작가답다. (다큐를 열심히 본 보람이 있다.) 시민회관 안팎, 중앙 우체국, 성당 스테인드글라스... 굳이 관람료를 내지 않아도 프라하 곳곳에서 무하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뭐지, 이 나라엔 멋진 예술가가 왜 이리 많은가. 부러웠다.
조금 더 걸으니, 눈앞이 번잡스럽다. 어디선가 쏟아져나온 사람들이 잔뜩이고 간판도 어지럽다. 바츨라프 광장이다.
바츨라프 광장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쬐고 있으면, 너무도 당연하게 자유를 새삼 생각하게 된다. 어느 날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님을,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을 당연하게 만들기까지 많은 희생이 있었음을.
꽤 오래 볕을 쬐다가 일어나려는데, 무심코 지나치던 벤치가 수상쩍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벤치마다 쓰여져 있는 글귀. 하나씩 찾아보며 천천히 광장을 가른다.
LIFE IS LIKE A PLAY : IT'S NOT THE LENGTH BUT THE EXCELLENCE OF ACTING THAT MATTERS. / Seneca
그러게 말이에요. 그만큼 잘하고 있는 걸까요?
LIFE IS EITHER A DARING ADVENTURE OR NOTHING AT ALL. / Helen Keller
보는 순간 이 여행을 참 잘 왔다 싶었어요. 잊지 않을게요.
광장 옆 쇼핑몰로 들어섰다. 영화관이 있다길래, 어떤 모습인지 보고싶었다.
상영관으로 향하는 레드카펫이라니. 'KINO'라는 네 글자도 참 좋아 가만히 소리내어 읽어본다.
반대편엔 익숙한 예매창구가 있는데, 아까 바츨라프 광장에서 본 기마상이 거꾸로 매달려 있다. 다비드 체르니의 작품이다.
포스터를 보니 <에베레스트>가 상영 중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아빠가 "이건 봐야지"하며 잔뜩 기대하시던 게 떠올랐다. 이번 추석 연휴 때 보신다고 했는데 예매는 했는지, 언제 볼 계획인지 갑자기 궁금해 전화를 걸었다. "여기 영화관 앞인데 <에베레스트>를 한다네. 영화는 봤어요? 어땠어? 재미있었어요? 명절인데 함께 있지 않아 미안해요." 보고싶어요.
프라하는 쇼핑몰에도 스테인드 글라스가 있다. 그것도 테슬라를 기념한 작품이다.
그렇게 쇼핑몰을 나선 순간, 진심으로 당황했다. '이 문을 나가면 정원이 있어요.' 안내문 정도는 있어야 마음의 준비를 할 것 아닌가.
광합성 잠깐 하다 가실게요~
예고 없이 갑자기 펼쳐진 풍경은 감동이었다. 하늘은 파랗고 햇살은 따스하고 바람은 선선하고 나무는 살랑인다. 완벽하다.
카페 루브르, 카페 슬라비아
슬슬 다리도 아프고 배도 고프다. 뭘 먹어야겠다 싶어, 아침에 지도에서 익혀둔 근처 카페를 찾아나섰다.
체코 전통요리 스비치코바
스비치코바는 돼지고기와 달작지근한 소스, 빵, 생크림, 그리고 딸기잼을 버무려 먹는 체코 전통요리다. 5점 만점에 4.5점! 정말 맛있었다. 돼지고기와 딸기잼의 조합이라니. 곁들인 오늘의 맥주는 BERNARD로, 딱 세 모금 마시는 순간 신호가 왔다. '알딸딸' 구간을 통과했습니다. 200m 전방에 취기가 접근합니다. 어쩌다보니 3일 동안 매일 다른 맥주를 맛보고 있는데, 이건 앞으로 피해야겠다
휘청까진 아니지만 휘적휘적 다시 걷는다.
왼편엔 트램이, 오른편엔 갤6 광고. 이 동네 참 재미있지 않아요? 휘적히죽
이 건물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요. 아니, 어떻게 춤추는 남녀를 보고 이런 건축물을 생각해냈어요? 정말 멋져요, 멋져! 히죽휘적
보다못한 이성이 카페인 처방을 내렸다. 지금 즉시, 롸잇 나우! 하벨이 즐겨찾았다던 카페 슬라비아다.
운좋게 창가자리에 앉았다. 창 밖으로 프라하성을 보며, 피아노 연주를 들으며, 압생트를 즐기며 이곳에 머물렀을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비록 지금의 난 카페인과 당분으로 재충전 중이지만.
카페 슬라비아 창 밖으로 선유도처럼 블타바 강 중간에 있는 섬을 봤을 땐 그리 대단한 곳일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배도 부르니 다리를 건너볼까하는 마음이었다.
레기 다리 위에 서니 카를교를, 프라하성을 향하고 있는 조각이 재미있어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다가 중간 지점까지 이르렀다. 그곳엔 다리 아래 위치한 작은 섬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그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도 미처 생각하지 않았다. 프라하에서 가장 사랑하는, 앞으로도 줄곧 그리워할 장소를 발견하게 될 줄이야.
카를교, 프라하성, 캄파섬... 떠들썩한 관광지를 한 걸음 떨어져 바라볼 수 있는 작은 섬. 눈을 들어 앞을 보면 강물이 따뜻한 햇볕을 품고 잔잔하게 흐르고 있다. 귓가엔 나뭇잎 살랑이는 소리만 들려온다.
서두르지 않고 각자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들 속에서, 나도 벤치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다리를 쭉 펴본다. 아침에 책 한 권 챙겨오길 정말 잘했다. 펼쳐 든 책에선 하루키가 미코노스로 향하고 있었다.
"아마, 마음에 꼭 드실 거예요" 하고 잉게는 말했다. "저도 거기에 일주일 정도 머무른 적이 있어요. 조용하고 굉장히 좋은 곳이죠."
나야말로 정말 이곳이 마음에 꼭 들었다. 이 풍경을, 소리를 행여나 잊을까 조바심이 일다가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 무엇도 이 섬의 평온을 깨트리진 못할 것 같았다. 낯선 곳인데 아늑했다. 혼자인데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온 마음과 몸을 가득 채우는 온기가 좋아, 해가 기울어 바람이 차갑게 느껴질 때까지 한참을 머물러 있었다.
아쉬운 걸음으로 섬을 나와, 블타바 강을 따라 걷는다. 아침엔 마냥 푸르던 하늘에 구름이 잔뜩 낮게 깔렸다. 어제와는 또다른 하늘이다. 망설임 없이 오늘도 카를교 타워로 향했다.
타워는 어제보다 한적해, 편하게 자리잡고 저녁에서 밤이 되는 풍경을 바라봤다. 아래의 카를교에서 이따금씩 악사들의 연주가 들려왔지만, 그 또한 한 걸음 떨어진 곳의 소리였다. 덕분에 그 무엇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가만히,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눈물이 뚝하고 떨어졌다. 스스로도 놀라 이게 뭘까 눈가를 더듬는데, 그게 신호탄이었다. 금세 차올라 뚝뚝, 볼을 타고 내릴 겨를도 없이 그대로 뚝뚝. 보고 뭐라할 사람도 없으니, 뚝뚝하면 뚝뚝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슬펐는데 슬퍼하지 않았던 일들이 그제야 실감났다. 화났는데 화내지 않았던 일들도, 아팠는데 아프다 말하지 않았던 일들도. 잘 지나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모두 뚝뚝 내려놓을 수만 있다면.
아침에 마주친 동기들을 만나 늦은 저녁을 함께했다. 혼자서는 먹기 힘든 요리를 잔뜩 시켜놓고, 자정이 될 때까지 수다를 이어갔다.
즐거운 여행을 계속 하길 응원하며, 헤어져 숙소로 돌아오는 길. 문득 생각했다. 하루의 마무리가 즐겁고 유쾌해 참 다행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