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Jeju
2017.04.08.토요일 ~ 2017.04.10.월요일
빨갛고 노란 꽃과 연둣빛 잎을 바라보다가, 봄 햇살의 온기가 온몸에 전해지면 그대로 깜빡 졸아도 좋겠다. 언제 잠들었냐는 듯 눈을 뜨면, 다시 또 빨갛고 노란 꽃과 연둣빛 잎이 바람에 살랑거리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야지. 참 좋겠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간질거렸다. 안 그래도 움 트는 싹이 간지러워 보이는 2월. 춥고 빼곡한 일상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이래서 봄이 오면, 산으로 바다로 달려나가는 걸까. 엄마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우리 사월에 제주도 갈까, 하곤 곧바로 비행기 표와 숙소를 예약했다.
난 김포에서, 엄마는 부산에서. 제주엔 내가 1시간 먼저 도착했다. 애정하는 제주시 맛집을 퀵하게 돌며, 미리 장을 봐두고 다시 제주공항으로 가니 시간이 딱 맞다. 게이트가 열리고, 엄마가 손을 흔들며 나온다. 이렇게 만나니 또 다른 느낌으로 반갑다. "잼이랑 전복김밥이랑 사 왔어." "이거 오면서 들었어. 친구들인지, 비행기 뒤쪽에 단체로 내 또래 여자들이 탔는데 전복김밥 먹자고 얘기하더라. 이게 그건가." "어어, 요새 엄청 핫한 거래. 내가 딱 사 왔지." 버스를 타고, 본격 뚜벅이 제주 여행 시작.
@hygge
공항에서 멀지 않고, 버스 정류장과도 15분 거리. 바다가 보이고, 유채꽃도 있는 곳. 우린 뚜벅이니까 근처에 마트와 식당도 필수. 이 모든 걸 만족하는 최고의 숙소가 바로 이곳, hygge!
@hygge
1층에는 그림 같은 창과 레스토랑이, 2층은 오롯하게 우리만의 공간이다. 통유리창 너머로 유채꽃, 파꽃, 애월바다가 차례로 다가온다. 말 그대로 꽃밭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봄 햇살을 쬘 수 있는, 상상을 200% 현실화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넷보단 둘이나 셋이 머물기 딱인 점도 좋았다.
김만복 김밥 @hygge
유리창에 달라붙어 멍하니 있다가, 점심 겸 저녁으로 야심 차게 준비한 김만복 김밥 개봉! 전복김밥과 전복주먹밥, 그리고 오징어무침 조합인데 가벼운 나들이 도시락으로 안성맞춤이었다. 특히 전복김밥은 한 입 가득 퍼지는 전복향과 계란향이 참 달콤했다.
안녕 @애월바다
밥을 먹었으니 소화 겸 산책을 나가볼까. 해변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조용하고 다정했던 애월의 바다. 처음엔 저 앞, 바닷물과 비슷한 눈높이의 바위에 앉아있었는데, 조금씩 물이 들어오고 조금씩 뒷걸음질 치다 보니 어느새 사방이 온통 바다다. 방파벽에 기대, 한참을 서 있었다.
제주도 푸른 밤 @hygge
매일 저녁 엄마는 색칠하고, 나는 책 읽고, 맥주 짠짠하며, 배경 음악 깔아둔 채 이런저런 속 이야기. 이 시간이 너무도 귀하고 소중해, 지금 같은 순간을 많이 많이 만들어야지 다짐했다. 이 귀한 시간은, 외할아버지가 버텨주고 계셔서 가능한 시간이었다.
3월 첫 주말, 외할아버지를 병원으로 모셨다. 병원에서는 잠도, 식사도 설치는 분이라 집에서 모셨는데, 이제 설치는 것조차 하실 수 없는 상황. 병원에선 마음의 준비를 하라 했고, 연명치료는 진작 거부하신 터라, 고향인 창원으로 모셨다. 마침 그날 나도 창원에 있어서, 서울에서 창원까지 꼬박 3시간을 달려온 외할아버지를 뵐 수 있었다. 첫날엔 고열에 들떠 계셨는데, 둘째 날엔 그래도 날 알아보고 불러주셨다.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단 생각으로, 그래도 이런 기회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으로, 손도 꼭 잡아보고 인사도 드렸다. 그 후 난 서울로 왔고, 엄마는 삼촌, 이모들과 교대로 병원을 지켰다. 그러는 동안 벌써 1달이 넘게 흘렀다.
1달을 넘게 버텨주고 계신다. 계.신.다. 우리 곁에 존재한다. 바튼 숨이지만, 빈자리는 아니다.
당신에겐 너무도 잔인한 시간일 것 같아서, 생의 열망과 자존감의 전쟁이 얼마나 가혹할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계셔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그래서 이번 제주 여행은 출발하기 전날까지도, 출발을 확신할 수 없었던 여행이다. 출발 전날 밤에서야,매일매일 병원에 다닌 엄마가 '그래, 잠깐 바람 쐬고 오자' 마음먹을 수 있었던 여행이다. 할아버지가 버텨주셔서 가능한 여행이다. 감사할 따름이다.
할아버지 병실에 있을 때, 춘천이며 창덕궁 후원 등등에서 함께 보낸 시간이 떠올라 무너지는 마음을 잡아주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많이 아주 많이 흐른 후에, 엄마는 색칠하고 난 책 읽고 맥주 짠짠하는 이 순간이 또 다른 무너지는 마음을 잡아주리라. 할아버지께 감사할 따름이다.
둘째 날.
어제보다 바람이 거세고, 날도 흐리다.
아라파파 홍차밀크잼 브런치 @hygge
제주도 아침은 아라파파 홍차밀크잼이 진리! 달콤하면서도 뒤에 남는 홍차의 쌉싸름한 향이, 그동안 얼마나 생각나고 그리웠는지. 여행 내내 야무지게 싹싹 긁어먹었다.
서해안 일주버스를 타고 모슬포항 도착. 운 좋게 가파도행 배표를 매진 직전에 끊었다. 출발까진 남은 시간은 2시간 남짓. 아침을 간단히 먹었으니 이제 든든하게 배를 채워볼까나.
흐린 날엔 따끈한 갈치조림 @어디더라?
식후 커피 한 잔 @맨도롱
드디어 가파도. 마지막 배여서 그런지 사람 적고, 날이 흐려 걷기 좋고, 바람이 거세 청보리 파도소리가 가득이다. 눈과 귀가, 크게 숨 들이쉬면 온몸이 시원해졌다. 마음까지 깨끗하게 씻어주는 기분.
청보리 파도가 싸아 @가파도
모슬포항에서 다시 서해안 일주버스를 타고 애월로 가는 길.
"아저씨 중문까지 얼마나 걸려요?" "내일 아침에 도착해요." "네????" "길 건너편에서 타~ 이건 섬을 반대 방향으로 도는 버스에요."
버스 안 승객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뚜벅이 여행의 장점은 그뿐이 아니다. 절반쯤 왔을까? 창밖의 바다가 너무 예뻐 중간에 후다닥 내렸다. 한담해변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카페 봄날
@애월한담 장한철 산책로
푸합 @애월한담
1시간 정도 걷고 사진 찍고 놀다 보니, 곧 깜깜해질 참이다. 후다닥 카카오택시를 불러, 집으로 달렸다. 1층 레스토랑에 푸짐~한 저녁이 기다리고 있으니, 마음이 급해진다.
갈릭버터쉬림프 @hygge
전복게우파스타 @hygge
hygge 키친은 덴마크 가정식 레스토랑인데, 덴마크 가정식에 대한 감이 없으니 그저 제주 먹거리를 새롭게 요리한 음식일 뿐이다. 그뿐인 줄 알았다. 한 입 딱 먹는데, 새우는 고소하고, 볶음밥을 고슬고슬, 파스타는 전복맛 제대로. 아, 왜 우리는 둘만 왔을까. 셋이 왔으면 메뉴 하나 더 시킬 수 있을 텐데. 왜 우리는 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은 걸까. 점심을 일찍 먹었으면, 저녁으로 하나 더 먹어볼 수 있었을 텐데. 지금도 침이 꼴깍. T^T
셋째 날.
어제보다 하늘이 더 흐리고, 바람도 거세다. 역시 아라파파 홍차밀크잼을 가득 묻힌 빵으로 아침 식사를 하며 창밖 구경 한참. 챙겨간 옷을 죄다 껴입고 나가,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동네를 한 바퀴 돌아본다. 집으로 들어와 따뜻한 물에 씻고, 커피 한 잔 마시며 노곤노곤하게 다시 창밖 삼매경. 거친 파도는 지루할 틈 없고, 그럼에도 파도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둥글다. 살면서 힘이 되고 위로가 될 기억을 또 하나 새겼다.
통유리 창의 2층이 사흘간 우리 집이었던 공간. @hygge
그리고, 공항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세운 또 다른 여행 계획.
다음엔 한라산 성판악 코스에 도전이다! (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