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iece of Helsinki
헬싱키 여행을 처음 떠올린 건 2015년 이른 봄날. 친한 동기들과 모여, 바르셀로나에서 시작해 헬싱키에서 마무리하는 5월 황금연휴 리프레시를 모색했었다. 스타트업 관련 일을 해보겠다며 연초에 부서를 옮길 때도, 리프레시를 떠날 계획이라고 여기저기 단단히 못박았다. 여행 준비는 항공권 결제면 충분하다는 게 모토이니, 이제 정말 떠나는 일만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창조의 기운이 슬금슬금 내게 다가온 것은. 가끔 지원하면 되는 일이 수시 지원으로 바뀌더니, 춘천 출장이 시작되고, 그 주기는 점점 짧아지고, 급기야 춘천에서 먹고 자게 된 것이다. 항공권까지 끊어둔 휴가니 가야 한단 굳은 느낌표가 물음표로 바뀌고, 끝내 말줄임표로 힘을 잃은 날. 항공권을 취소했다. 그해 봄날엔 그렇게 30만 원 상당의 수수료, 춘천의 추억, 그리고 동기들의 여행 후기만이 남았다.
2016.08.22. 월요일
이번엔 정말 헬싱키로 떠나는 거다. '이번엔 정말'이 주는 설렘과 흥분은 여느 때와 달랐다. 숱한 훼방 속에서 마음은 더 간절하고 타오르기 마련이다.
보통의 여행이 오랜 비행시간 후에 시작하는 것과 달리, 헬싱키 여행은 인천국제공항에서 핀에어에 들어서는 순간 시작했다. '핀란드 사람'이란 뜻의 접두어 Finn-이 붙은 이 비행기는, 그 이름답게 핀란드 여행의 머리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마리메꼬 담요와 티슈 그리고 파우치, 승무원이 특별히 맛있는 맥주라며 건네준 KARHU. 이것이 이번 여행의 시작이다.
디자인 관련 다큐나 볼까 뒤적이다가 SLUSH 영상 클립을 잔뜩 발견했다. VR 기술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을지 토론하는 영상을 재미있게 보던 중, 문득 생각했다. 며칠 전에 읽은 VR 관련 아티클은 그렇게 눈에 안 들어왔는데, 지금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보다니. 일상도 여행처럼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비행기 모양과 핀에어의 F를 결합한 로고. 디자인의 디테일과 기발함은 이번 여행 내내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빼곡하게 서 있는 나무의 녹색. 트램의 녹색과 노랑, 튼튼해 보이는 건물의 벽돌색, 파스텔톤의 하늘색. 공항에서 숙소로 향하는 동안 만난 헬싱키의 색깔들.
우리의 첫 숙소 GLO는 중앙역과 에스플라나다 공원 사이에 있어, 위치만 놓고 봐도 대만족이다. 게다가 내 최고의 여행 메이트는 항공권에 이어 호텔 숙박권도 이벤트를 찾아내는 능력자!
방 구경도 끝났고 아직 밖은 환하니 서둘러 나서본다. 처음으로 향하는 곳은 언제나 광장이다. 골목을 이리저리 꺾어 들어가다가, 갑자기 사방이 확 트이는 곳. 여기저기에서 온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가, 또 각자의 골목으로 떠나는 곳. 광장에 들어서니, 그 규모가 너무 커 원근감을 가늠할 수 없는 헬싱키 대성당이 맞이한다. 높다란 계단을 올라가 돌아보는 순간, 헬싱키가 한눈에 들어온다. 작은 광장이 아니었구나.
커다란 비눗방울에 손을 뻗어보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구경하다가, 어느새 나도 같이 팔을 쭉 뻗어 달려본다.
광장에서 골목골목을 구경하다 보니 다다른 항구. 아직 해는 중천에 있지만, 나름 시간은 저녁인지라 노점은 대부분 장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다른 선택의 여지없이, 유일하게 문 연 노점으로 들어간다. 드디어 말로만 듣던 그 연어 수프다. 따끈한 수프에 연어가 이렇게 듬뿍 들었는데, 맛이 없을 수가 없다.
애정하는 관람차를 탈 생각에 한창 신났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생각보다 너무 낡았고 제대로 운행도 하지 않는다. 할 수 없이 그 옆 언덕에 있는 우스펜스키 성당으로 향한다. 내부도 인상적이지만, 성당 앞에서 바라본 헬싱키의 하늘에 비할 바는 아니다. 파스텔톤의 폭신한 하늘 위에 Holiday가 휘날리니, 휴가를 제대로 오긴 왔구나 싶다.
호텔 쪽으로 다시 걷기 시작. 이 도시에선 당최 원근감을 잡을 수가 없다. 꽤 멀리 있다고 생각했는데 걷다 보면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있다. 역시나 너무도 빠르게 호텔 앞 에스플라나다 공원까지 와버렸다. 우리 여기서 꼬박 9일을 보내야 하는데 벌써 숙소 동쪽을 다 둘러본 셈이다. 어디 다른 여행지를 한 곳 더 들러야 하나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공원에 앉아 있는 동안 그 답 역시 빠르게 찾았다. 굳이 어딜 가지 않아도 괜찮다. 하늘, 나무, 그리고 오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보는 걸로 충분하다.
공원 양옆으로 늘어선 가게 구경 삼매경. 아니 아직 밖이 이렇게 환한데, 문 닫은 곳이 왜 이리도 많나요. 다 칼퇴하고, 공원 산책하고 그러는 건가요.
헬싱키에 온 지 하루도 안 지났는데, 먹고 싶었던 음식 중 연어 수프에 이어 시나몬롤까지 클리어할 기세다. 시나몬롤은 예상했던 향과 맛이었지만, 카페라떼는 기대가 없었던 탓일까. 감동 그 자체였다. 앞서 여행 갔던 동기들도 이래서 카페 투어를 한 건가. +_+
원래 호텔에 들어갈 생각이었는데, 카페라떼 에너지로 좀 더 걸었다. 너무도 가보고 싶었던 아카데미아 서점이다. 알바 알토의 재치로 가득한 건축물이자, 온갖 색들로 눈이 즐겁고, 종이 냄새로 코도 킁킁 분주한 곳. 일상이 이렇게 다양한 색으로 가득 차 있으면, 생각도 삶도 그만큼 다양해지지 않을까.
오늘 겨우 첫날이니, 이제는 정말 숙소로 돌아가야지. 호텔에서 가볍게 먹을 저녁거리를 사러 스톡만 백화점 지하에 들어왔다. 여긴 식료품 매장도 색들의 향연이다. 하몽은 샀고, 맥주는 어디 있나.
여기선 맥주를 안 판다기에, 중앙역에 있는 마트로 향했다. 여행 첫날 저녁인데 맥주가 빠질 수야 없지. 밤 9시가 다 되어가는데, 하늘은 이제야 조금씩 붉어진다. 낯선 색의 스펙트럼에 마음이 일렁인다. 저녁노을이 이 정도이니, 오로라는 얼마나 감동일까.
카페라떼도 감동, 노을도 감동, 이제 이 감동적인 하루를 마무리할 맥주만 있으면 된다. 그런데 중앙역 옆 마트의 맥주 냉장고에 커다란 자물쇠가 걸려있다. 물어보니 주류 구매는 밤 9시까지만 가능하다고 한다. 뭐야, 이런 말 없었잖아. 이제 겨우 해가 지려고 하는데 왜 대체 왜! T_T 하늘 보며 낭만에 빠져있는 그 시간이 그리도 결정적인 순간이었을 줄이야.
이렇게 된 거, 그냥 먹고 가기로 했다. 괜찮아 보이는 Bar로 직진! 그런데 신분증 검사부터 시작한다. 그거 아까 호텔에 두고 나왔는데, 내가 말이야 지금 회사를 몇 년을 다녔냐면...... 하나도 통하질 않는다. 여권을 챙겨들고 다시 나올 엄두도 안 난다.
그냥 이렇게 첫날을 보내야 하나, 축 처져서 호텔로 돌아왔다. 혹시나, 정말 혹시나 싶어 1층 Bar에 들렀는데 여긴 그래도 말이 좀 통한다. 그래 헬싱키에도 이런 곳이 있었어! 호텔 투숙객이라고 하니, 신분증 검사 없이 맥주를 딱 2캔만 팔아주셨다!!! 길었던 싱키싱키 여행의 첫날은, 이렇게 하몽과 귀한 맥주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