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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 Oct 16. 2016

이탈리아#3 피렌체의 또 다른 시간

Bring home a piece of Italy - 2014년, 봄

평소 같으면 힘들기 그지없었을 아침 일찍 일어나기 미션도 여행 에너지로 거뜬히! 서서히 밝아오는 새벽하늘을 창밖으로 곁눈질하며 짐을 꾸렸다. 아침 기차를 타고 달려간 다음 행선지는 피렌체. 소문으로만 듣던 이탈리아 기차의 멈춰 서기 신공을 2번 겪은 도착이 조금 늦어졌다. 조금씩 흐려지는 하늘이 못내 신경 쓰였지만, 비에 젖은 피렌체도 좋을 것 같았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뭔들 안 좋았을까~


피렌체 숙소는 이번 여행에서 유일하게 잡은 한인민박이었다. 더블룸 2개만 갖춘 한적한 민박이었는데, 내가 머무는 기간엔 다른 손님이 없어서 거의 아파트 한 채를 혼자 쓴 셈이다. 민박 주인 언니가 적어준 맛집 리스트가 있으니 식당 걱정도 끄읕! 



 피렌체에 도착하면 다들 두오모나 시뇨리아 광장으로 향한다지만,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제일 먼저 보볼리 정원을 찾았다. 가는 길에 All’Antico Vinaio에 들러 샌드위치도 샀다. 드디어 피티 궁전 앞. 보볼리 정원에서 커다란 나무 아래 손수건 펼쳐 놓고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며 피렌체 전경과 봄햇살을 즐기겠다는 내 야심 찬 로망이 실현되기 직전이었다.  

상상했던 그림에 딱 맞는 나무도 찾았고, 손수건도 펼쳤다. 완벽한 장소에 완벽하게 앉는 순간 믿고 싶지 않은 찬 기운이 얼굴에 느껴졌다. 뚝- 하고, 내내 수상쩍던 하늘이 드디어 비를 뿌리기 시작한 것이다. 30분, 아니 15분도 기다려주지 않는 이 매정한 하늘 같으니. 비 오는 피렌체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왜 지금 이 순간이란 말인가. 맥 빠지게 출구로 내려오던 길, 피티 궁전 한 구석에 조금 모양은 빠지지만 비를 피해 앉을 수 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게다가 피렌체 전경까진 아니라도 두오모가 보이는 곳! 그 자리에 철퍼덕 앉아버렸다. 꿈꿨던 그림에서 나무 그늘과 봄햇살만 빠졌을 뿐이라며 셀프 토닥토닥. 꿈은 이루어진다, 다만 생각했던 것 같지 않을 뿐.


폰테 베키오를 지나 시뇨리아 광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미리 예약해둔 우피치 미술관 투어 시작을 기다리며 광장 구경 시작. 미술책이 3차원 실제로 눈앞에 펼쳐져 있었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광장은 미술관 그 자체였다.


유럽 최고의 성수기라는데 이상하게 베네치아도, 피렌체도 사람이 그리 붐비진 않았다. 우피치 미술관 투어에서도 가이드가 내내 이 방을 대기줄 없이 입장하다니 믿을 수 없다며 몇 번이나 말했는데, 내 동선이 문제인 걸까 심각하게 고민하려는 찰나에 이유를 알게 됐다. 범인은 '시성식'. 다들 로마로 몰려간 것이다. 덕분에 비교적 여유롭게 미술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보티첼리 방에서 <비너스의 탄생>과 <프리마베라>를 앉아서, 시야 제한 없이 즐길 수 있다니!! 카라바조가 방패에 그린 작품, <메두사의 머리>도 왼쪽 오른쪽에서 번갈아 보는 호사를 누렸다.  

우피치의 유일한 포토존에서 인증샷도 찰칵.  


베네치아에서 피렌체로, 피렌체 안에서도 여기저기 다니느라 소모한 체력을 보충할 차례. 

발바닥이 너무 아픈데도 피렌체에서의 저녁은 티본스테이크여야 한단 일념으로 맛집 리스트 중 가장 가까운 곳에 들어갔다. 가게 분위기도 좋았고 맛도 일품! 역시 고기를 먹어줘야 힘도 나는 법이다.


식당으로 들어설 때만 해도 식사 후 곧장 숙소에 들어가 휴족시간()과 함께 격렬하고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안 하리라 마음먹었지만, 고기 한 점 두 점 먹으니 갑자기 피로가 사라지고 와인 한 모금 두 모금 삼키니 에너지가 샘솟았다. 결국 소화도 시킬 겸 아르노 강을 건너 미켈란젤로 언덕으로 향했다. 


구글맵과 아직 해가 떠 있다는 사실에 의지해 걷기 시작했는데, 가는 도중 인터넷 연결이 안 되더니 해는 저물고 좀처럼 언덕은 나오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지 사람 한 명 없는 길이 정말 무서웠지만 그래도 이만큼 걸어 올라왔다는 게 뿌듯해 사진은 또 찍었다. 이제 후퇴는 없다.(사실 길도 모르겠다) 그저 전진만 있을 뿐, 위로 또 위로!! 

그리고 드디어 눈 앞에 펼쳐진 피렌체의 밤. 하나둘 불을 밝히며 조금씩 어두워지는 풍경을, 같은 시간에 속해있는 것 같지 않은 눈 앞의 공간을 오래오래 지켜봤다. 

두오모로 향하는 사람들 따라 눈치껏 헤매며 숙소로 돌아가는 길. 현재의 시간이 잠시 잠에 든 사이, 언젠가 이 거리를 걸었던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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