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angha Jul 11. 2019

걷는 사람, 하정우 / 하정우


달리기는 못하지만 걷는 건 꽤 하는 편이다. 물론 전제는 있다. 내 속도로 걷고, 내 흐름으로 쉬어가기. 그래서 이 책이 궁금했다.


       

p.8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돌아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오직 걷기밖에 없는 것만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연기를 보여줄 사람도, 내가 오를 무대 한 뼘도 없었지만, 그대로 내 안에 갇혀 세상을 원망하고 기회를 탓하긴 싫었다. 걷기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것만 같았던 과거의 어느 막막한 날에도, 이따금 잠까지 줄여가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하는 지금도 꾸준히 나를 유지하는 방법이다.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서문 -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모두가 익히 잘 아는 그 하정우가 쓴 책이다. 알고보니, 이 사람 하루에 기본 3만 보를 걷는단다. 궁금한 걸 떠나 믿기지 않는다. 하루는 24시간으로 정해져 있는데, 3만 보라고? 강남 집에서 마포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하고, 술자리에서도 12시 전후면 벌떡 일어나 집까지 걸어간단다. 하루 10만 보를 걷기도 했단다.


p.11
오늘도 각자의 영역에서 크고 작은 족적을 찍으며 하루를 견딘 우리는 모두 이 지구라는 별을 굴리고 있는 길동무다.

서문 - 웬만하면 걸어다니는 배우 하정우입니다.

이 문장을 챙겨둔 건, 물론 내 소녀 감성도 있지만 *--*, 그 외에도 단어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골랐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도', 자신 말고 '각자', 삶 말고 '영역', 버틴 아닌 '견딘'. 이 서문에서 난 이 배우에게, 아니 이 저자에게 반했다.


p.29
"내가 오늘 기분이 영 별로야. 웬만하면 다음에 얘기하자." 괜히 예민해지고 말과 행동에 날이 서는 때가 있다. 그런 날 내가 삐거덕거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못되게 구는 건 대개 그냥 '기분 탓'이다. 그런데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고백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든 게 '기분 탓'이라는 건, 사실 내 기분에 '당하는' 사람만 안다.
기분은 무척 힘이 세서 누구나 기분에 좌지우지되기 쉽다. 순간의 기분 때문에 그릇된 판단을 내릴 때가 있고, 누군가에게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단지 기분 때문에, 처리해야 할 많은 일들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맥없이 하루를 날리는 경우도 있다. 나는 이런 불쾌한 기분이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경험상 잘 알면서도 당장의 기분에 지배당하는 삶을 산다. 사실 기분은 인생에 어마어마하게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당장의 기분을 바꿀 수 있다면, 어쩌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중략)
나는 나의 기분에 지지 않는다. 나의 기분을 컨트롤할 수 있다는 믿음, 나의 기분으로 인해 누군가를 힘들지 않게 하겠다는 다짐. 걷기는 내가 나 자신과 타인에게 하는 약속이다.

하루 3만보, 가끔은 10만보
p.186
말에는 힘이 있다. 이는 혼잣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 같지만 결국 내 귀로 다시 들어온다. 세상에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은 없다. 말로 내뱉어져 공중에 퍼지는 순간 그 말은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난에는 다른 사람을 찌르는 힘이, 칭찬에는 누군가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않도록 말을 최대한 세심하게 골라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내보내야 한다.

먹다 걷다 웃다

이 성스러운 걷기 예찬서를 읽은 날, 마침 난 매우 화가 나 있었다. 아침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화가 났고, 한 순간으로 그칠 수 있었던 일에 얽매여 하루를 온통 꿀꿀하게 보내버린 게 또 화가 났다. 그래서 지극히 쉬운 걷기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고, 그로써 자신의 일상을 지켜내는 이 책이 마음에 와닿았다. 어쩐지 나도 따라 걸으며 위로를 받는 것 같았다. (물론 내 몸뚱아리는 소파에 길게 늘어져 있었지만...)


p.291
살면서 불행한 일을 맞지 않는 사람은 없다.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인생이란 어쩌면 누구나 겪는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일에서 누가 얼만큼 빨리 벗어나느냐의 싸움일지도 모른다. 누구나 사고를 당하고 아픔을 겪고 상처받고 슬퍼한다. 이런 일들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무너뜨린다. 그리고 그 상태에 오래 머물면 어떤 사건이 혹은 어떤 사람이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망가뜨리는 지경에 빠진다. 결국 그 늪에서 얼만큼 빨리 탈출하느냐, 언제 괜찮아지느냐, 과연 회복할 수 있느냐가 인생의 과제일 것이다. 나는 내가 어떤 상황에서든 지속하는 걷기, 직접 요리해서 밥 먹기 같은 일상의 소소한 행위가 나를 이 늪에서 건져내준다고 믿는다.

사람,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

이 책을 읽고 맞이한 주말. 백팩에 물 한 병과 손수건을 챙겨들고, 항상 지나치기만 했던 산책로로 가보았다. 7년 가까이 이 동네에 살면서, 창밖으로 훤히 보이는 저 길에 가볼 생각을 어쩜 한 번도 안 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안내판을 보니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청계천에서 잠원 한강지구까지 이어지는 길이란다. 나무가 많아 여름 햇살을 막아주고, 흙바닥이라 걷기 좋은 길이다. 군데군데 운동기구와 쉬어가는 벤치도 있다. 동네 강아지가 총출동했고, 오가는 사람도 제법 있어 무섭지도 않다. 이 정도면 합격!


팟캐스트를 들으며 설렁설렁 1시간 정도 걸으니 어느새 잠원역이다. 돌아가야할 길이 있으니, 내 체력에 한강까지 가는 건 무리다 싶어 오늘은 여기서 유턴하기로 한다. 가끔 마음이 시끄러울 땐 이 길을 걸어야겠다. 아직 안 가본 길도 많으니, 탐험하는 재미도 쏠쏠하겠지. 


이 책 덕분에 좋은 힐링템을 하나 얻었다.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고, 웃긴 대목도 많은 책이다. 하정우의 힘찬 에너지에 기대 잠시 충전을 할 수도 있다. 핏이 잘 맞다면, 나처럼 걷기 좋은 길 하나쯤 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밤이 선생이다  / 황현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