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한기인데 왜 바쁜가
*8월 6일에 날 것으로 써서 뉴스레터 커뮤니티에 하소연하고, 여긴 조금 다듬어서 남겨두기.
“우리와 시너지 낼 수 있는 스타트업에 지분 투자하고 성장을 지원하며 협력을 추진하는 경영진 직속 프로그램입니다.”
미팅에서 메일에서, 하루에도 수번 반복하는 문장이다. 내가 몸담고 있는 조직이자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이 문장엔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자주 받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적절히 섞여 있다.
시너지 낼 수 있는 :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나 사회공헌은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의 첫 번째 아젠다는 아닙니다. 우리가 더 성장하고 더 잘하기 위해 필요한 파트너를 찾는, 전략적 필요에서 출발해요. 그 과정에서 자연스레 생태계에 기여할 기회도 만나고 영향력도 생기겠지만, 그게 목적은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들이 나서서 지구를 구해야 쓰지 않겠나’하셔도 못하고 안 합니다.
지분 투자하고 : 네, 정부지원금 아닙니다. 다른데 투자 받고 오셔도 되고, 다른 정부 지원프로그램과 중복 이슈 당연히 없습니다. 다만, ‘지분’이니까 법인은 설립하셔야 해요. 혹은 조만간 설립할 계획을 갖고 계셔야 합니다.
협력을 추진하는 : 투자하면 무조건 협력하고 싶지만, 그게 그리되지 않더군요. 우리 관심사도, 스타트업 전략도 수시로 변화하더라고요. 그게 잘 맞더라도, 실제 협력하기 위해 이것저것 맞춰보는 과정에 수많은 변수가 있어요. 그러니 협력을 ‘추진’하는 게 우리의 최선입니다. 하지만 저 한 줄에 들어간다는 건 ‘열심히 적극적으로 꾸준히’ 추진한다는 겁니다.
경영진 직속 : 가끔 ‘본사에서 컨펌받으셔야 하냐’는 질문을 주시는데, 전사 아니 전계열사 조직과 얼라인하려고 열일 중이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덧붙여, 별도 법인도 계열사도 아닌데 ‘본사’라는 말을 들으면 묘한 느낌이에요. (신입 12년 차의 감성)
프로그램 세팅 단계에 합류했으니 벌써 4년째다. 내가 맡은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저 메시지로 우리를 브랜딩하고, 온오프 콘텐츠를 만들고, 또 확산시키는 일이다. 보도자료에서, SNS 공식 계정에서, 온라인 콘텐츠와 배너에서, 오프라인 데모데이와 컨퍼런스에서 수없이 반복 강조해 온 일이다.
그런데 최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SNS 타임라인은 스타트업씬 지인들의 비판글로 가득했다. 그 속에서 난 투명 인간처럼 서 있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우리 프로그램이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저 메시지를 팔아온 사람으로서 마음 편히 제3자가 될 수도 없었다.
공식적인 홍보/마케팅을 접고 2주가 지났다. 손발이 묶인 강제휴업 같았다. 위기대응은커녕 사태는 악화됐지만, 우리 일도 마냥 미룰 수만은 없다. 새로 투자한 팀 소개를 해야 이 팀도 그걸 레버리지 삼아 채용도 하고 사업도 할 텐데, 스타트업이 무슨 죄인가.
머리로는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입장을 밝힐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 이슈엔 침묵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홍보 마케팅을 재개해야지.
그런데 손가락이 참 안 움직였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이 어쩐지 비겁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알고 있는데 아무것도 몰라요~하며 다른 말을 하긴 싫었다. 예전에 같은 일을 했던 팀장님을 만나, 속상함을 털어놨다. 영혼을 잠시 출가시키고, 감정이입하지 않은 채 그냥 ‘일로만’ 해야 하는 거 아는데 근데 잘 안돼요. 그동안 우리 온갖 이슈에 “말씀드립니다”라고 정면 돌파해왔는데, 하루아침에 이게 뭔가요.
어찌 됐든 이제는 개인적인 속상함을 잠시 넣어두고, 뭐든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깨어있는 하루 중 가장 긴 시간을 쏟는 ‘일’인데, 영혼없이 재미없이 공감없이 하고 싶진 않다. 하지만, 필요할 때는 언제든 스스로를 분리할 줄도 알면 좋겠다. 일하는 게 즐겁지만, 일하지 않는 내 삶도 즐겁길 바란다. 그 내공은 언제쯤 쌓이는 걸까. 무심히 시간은 흘러 강제 휴업도 이제는 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