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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 Oct 05. 2020

장 지글러 대탐험 - 우리 이렇게 살아도 좋은 걸까


해야 할 일을 하기 싫어, 온종일 다른 일을 했다.

시작은 이모가 언급한 책 한 권이었다.


자이언트 / 피터 필립스


147개 회사가 전 세계 부의 약 40%를 차지하고 있을 만큼, 경제 불평등은 심화되고 있다. 이 책은 부와 권력이 국가의 그것을 넘어선 '초국적 파워 엘리트' 389명의 리스트를 담고 있다. 이들은 크게 자산운용사, 기업 경영진,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연구기관 및 포럼, 대중매체 경영진으로 나눠볼 수도, 그렇게 나눠보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 서로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고 중첩되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의 투자자이고, 이사진이나 자문 위원이기 때문이다. 얽히고설켜 나눠지지가 않는다. 전화번호부를 옮겨놓은 것 같은 수십 장의 명단은 그리 재미난 읽을거리가 아니지만, 막연하게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동질한 배경의 소수가 촘촘하게 엮여있단 사실에 책장을 덮을 수 없었다.


전 세계 인구의 0.7%가 전 세계 부의 47%를 소유하고 있다.


이대로도 좋은 걸까, 무겁고 괜한 마음에 장 지글러 책을 한 권씩 읽어나갔다.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장 지글러


유엔인권위원회 식량특별조사관인 장 지글러가 기아 문제를 다룬 책이다. 지구상에서 인구 대비 식량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 한 편에서 식량은 소가 먹고 바이오원료로 태워지고 그러고도 남아돌아 썩어 버려지는데, 다른 한편에선 5초마다 1명의 아이가 굶주림으로 죽어간다. 무겁게 시작한 마음이 더 무겁고 답답해진다. 남은 책장이 그리 두껍지 않은데, 그래도 희망이 있단 얘기에 살짝 당황스럽다. 이 대책 없고 막연한 희망은 뭐람.



탐욕의 시대 / 장 지글러


두 번째 책에선 세상을 요지경으로 만든 구조적 원인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된다. 이윤을 위해 도를 넘어선 거대 다국적 기업, 자본주의와 제국주의가 결합한 선진국, 남 탓할 것 없이 부패와 폭력에 물든 '가난한' 국가.


p.329 끝맺는 말 - 다시 시작하자

세네갈 강 하구에 사는 월로프족들이 즐겨 쓰는 속담이 이와 같은 상황을 잘 요약해준다. "인간은 인간의 치료약이다."



빼앗긴 대지의 꿈 / 장 지글러

p.43 증오의 기원

사건이 주는 상처가 깊으면 깊을수록 사회는 그에 대한 기억을 이와 비례해서 깊은 곳으로 쑤셔넣는다.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 집단의식은 서서히 끔찍한 경험을 길들여갈 수 있다. 오랜 숙성 기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그와 관련된 소통이 가능해지며, 끔찍한 경험은 분석 가능한 대상으로 다가오게 된다.


이 책은 지금의 사태를 만든 여러 가지 요인 중 특히 식민지 제국주의를 집중적으로 파헤친다.



p.80 증오의 기원

거의 모든 남반구 국가 수반들이 비록 연설가적인 재능은 약간 뒤떨어졌을지 모르나 보상을 통한 정의 구현, 서양의 참회, 남반구 주민들의 상처입은 기억을 인정할 것을 주장하는 부테플리카 대통령과 별반 차이 없는 연설을 들려주었다.

부테플리카의 연설을 들으면서 서양 측은 매우 교활한 반응을 보였다. 프랑스, 벨기에, 영국 등의 대표단 사이에서는 야유가 터져나왔다. 이는 식민주의자들이 느끼는 경멸감을 잘 보여준다.

보상을 통한 정의 구현이라고? 그건 개인적인 원한에서 비롯된 터무니 없는 요구에 불과하지!

참회하라고? 서양을 악의적인 적으로 만들어 불만에 쌓인 알제리 국민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군!

기억을 인정하라고? 그건 죄책감을 주려는 수사에 불과하지! 아니 그보다 더 고약할 수도 있어. 재정적인 면이나 무역에서 서양에 더 많은 양보를 받아내려는 계산이 깔려 있을지도 모르니까.


p.96  증오의 기원

질 델리아는 "식민지 지배의 끝은 식민주의의 역사를 식민화하는데 있다"고 말했다.


p.97 증오의 기원

"여기서 중요한 건 명확하게 보고, 명확하게 생각하고, 위험할 정도로 듣고, 식민주의가 원칙적으로 무엇인가라는 순진한 질문에 명확하게 답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식민주의가 아닌 것에 의견을 모아야 한다. 식민주의는 복음화도, 자선사업도, 무지의 한계를 한 걸음 뒤로 물러나게 하는 지식도, 질병도, 독재도, 신의 확산도, 권리의 확대도 아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결정적으로 그것은 규모가 조금 큰 모험가, 해적, 잡화상 또는 선주, 금 노다지를 찾는 사람, 장사꾼의 몸짓이었으며 탐욕과 무력의 몸짓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몸짓 뒤에는 역사의 한순간에 내부적인 어떤 동기에 의해서 반목하는 경제 간의 경쟁을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산시키겠다는 문명의 저주스러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유럽은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변호의 여지가 없다"라고 에메 세제르는 자신의 책에서 설파하고 있다.


코로나19는 유럽에 대한 환상을 한 꺼풀 벗겨냈다. 도덕, 윤리, 연대, 성찰은 기대에 못 미쳤고 돌이켜보면 이번이 처음도 아니었다.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문장에, 에메 세제르의 책이 궁금해졌다.


굶주리는 세계, 어떻게 구할 것인가? / 장 지글러


앞서 나온 책과 문제 의식, 사례, 풀어내는 방식이 상당 부분 겹친다. 복습 삼아 읽고, 바이백으로 쓩.



왜 검은 돈은 스위스로 몰리는가 / 장 지글러


뭔가 은밀하고 수상한 음모가 도사리고 있을 것 같은 '스위스 은행'의 구조를 파헤치는 책. 스위스의 금융 정책과 관련 법제, 이해관계를 흥미롭게 다루고 있다.



인간의 길을 가다 / 장 지글러


장 지글러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 인문학과 문화, 학술 연구 등을 총망라한 책이다. 매우 졸리고 문장도 눈에 잘 안 들어온다. 하지만, 이전 책들이 장 지글러가 바라보는 세계에 대한 글이라면 이 책은 장 지글러 스스로에 대한 고백글 같아 차마 바이백에 넣을 수 없었다. 언젠가는 이 어려운 글이 이해되는 날이 오겠지, 이거 한 권 둔다고 공간 얼마나 차지하겠어.


p.6 우리는 인간의 행복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래, 난 이성이 인간들을 지배하는 부드러운 힘을 믿어. 인간은 그 힘을 결국은 거역할 수 없어. 내가 돌 하나를 떨어뜨리며 그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할 때, 오랫동안 그저 바라보기만 할 인간은 없을 거야. 어떤 인간도 그럴 수 없어. 하나의 증거에서 시작되는 유혹은 너무 커. 대부분 인간은 그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에는 모든 인간이 그 유혹에 빠지지.

- 베르톨트 브레히트, '갈릴레이의 생애'


p.48 지식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파리코뮌의 위대한 역사가 프로스페 올리비에 리사가레는 우리에게 이렇게 상기시킨다.

"민중에게 거짓된 혁명의 전설을 이야기하고 거짓된 사실로 현혹시켜 민중을 속이는 자는 항해자에게 틀린 지도를 그려주는 지리학자와 마찬가지로 처벌받아야 한다.



유엔을 말하다 / 장 지글러


식민지 제국주의, 스위스 은행, 이번엔 유엔이다. 교과서에서 배우고, 한국인 사무총장 얘기만 들었지 마치 무지개 너머 오즈의 마법사 같았던 유엔을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p.349 우리가 함께 승리를 획득해야 할 것들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십계명 중에서 '사람을 죽이지 말라'는 계명은 인간 생명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경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를 향해 '아니오'라고 말해야 합니다. (…) 우리는 '소비 문화'를 만들었고, 이 문화는 지속적으로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단순한 착취와 억압을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상황입니다. 배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속하느냐 속하지 못하느냐와 같이 존재의 뿌리를 건드리는 문제입니다. 그들은 선택의 순간에 사회의 최하층이나 빈민가에 있는 힘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 밖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입니다. 배제당한 사람들은 '착취당한' 것이 아니라 '버려진' 무엇이 됩니다."


p.353 우리가 함께 승리를 획득해야 할 것들

마하트마 간디가 그 길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그들이 당신들을 무시한다. 이어서는 그들이 당신들을 비웃는다. 이어서 그들은 당신들과 싸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당신들은 승리한다."



왜 세계의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가 / 장 지글러


이 책의 역할은 앞서 나온 책들을 반복 강조하는 것이라, 집중력이 자꾸 흩어진다. 장 지글러의 책을 읽는 내내 차곡차곡 쌓여, '유엔을 말하다'에서 정점을 찍은 우울과 무기력이 계속 내 주위를 맴돈다. 처음 품었던 선의와 희망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눈 앞엔 단순하지 않은 현실, 엇갈리는 이해관계가 가득하다. 어느새 불어난 구조적 모순과 한계는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댈 수는 있는 건지 막막하기만 하다.


책을 겉핥고 있는 나조차 이런데, 장 지글러는 어떻게 수년째 지치지 않고 계속 이 문제를 파고들 수 있는 걸까. 이 사람 대체 뭐지(그래서 더더욱 '인간의 길을 가다'를 책장에 남겨둬야 했다) 싶어 책을 덮는데, 표지의 추천사 한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표지 <트리뷘 드 즈네브>

"결코 포기할 줄 모르고, 같은 문제를 끊임없이 두드리는 사람. 그는 우리가 '고작'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여 언젠가 공동의 메시지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하고 있다. 희망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법이다."


고작 몇 줄의 글로 우울과 무기력을 이야기해 부끄러웠다. 바이백 확정이었는데, 이 책도 떠나보낼 수가 없다. 앞선 책과 반복되는 내용이면 뭐 어떤가, 그게 쌓여 언젠가 세상을 바꿀지도 모르는데. 희망은 삶을 이어지게 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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