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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a Oct 01. 2020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승효상

바라는 삶의 공간


묵상을 읽은 후, 시기를 거슬러올라가 승효상 건축가의 책을 한 권씩 읽고 있다.



빈자의 미학 / 승효상


p.31

그러나 60년대에 들어서 우리 강토에 휘몰아친 '잘 살아보세'라는 편향된 가치 추구가 왜 잘 살아야 되는지에 대한 분별력 없는 구호가 파행적 정치모습인 군사독재로 이어지면서, 우리는 너도나도 졸부의 꿈을 이루려 염치도 버리고 정서도 버리고 문화도 버리고 오늘날의 국적도 정체성도 없는 도시와 건축을 만들어 내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뭉뚱그려진 전체 속에서 박제된 껍데기를 가지고 서로의 영역만을 빼앗기지 않으려하는 허무의 모습으로 이 시대를 지탱하고 있다.

이것인 이 시대의 위기이며 우리의 미래에 대한 위협이다.


p.59

나는 이를 '빈자의 미학'이라 부르기로 한다. 빈자의 미학. 여기에선 가짐보다 쓰임이 더 중요하고, 더함보다는 나눔이 더 중요하며, 채움보다는 비움이 더욱 중요하다.


승효상 건축가가 자신이 건축을 정의한 글이다. 이것만은 꼭 지켜내고 싶다는 절박함으로, 그래서 도로 물리지 못하도록 세상에 꺼내놓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묵상'을 비롯한 다른 책에서도 충분히 반복되고 있는 내용이지만, 승효상의 책이 내 책장에 꽂혀있는 한 이 절박한 선언집도 그 곁에 두어야겠다.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승효상


한 작가의 책을 연달아 읽다 보면, 중간에 비슷한 글이 되풀이되는 책이 한두 권 나오기 마련이다. 이 책이 그러하다. 앞서 읽은 책과 거의 동일한 표현, 동일한 대상이 연거푸 등장한다. 인상적인 장소와 그에 대한 사유를 담은 이 한 권은, 아래 글귀만 남기고 다시 서점으로 가져가야겠다고 거의 마음을 먹었다.


p.6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 박노해

자기 시대의 풍상을 온몸에 새겨가며

옳은 길을 오래오래 걸어나가는 사람

숱한 시련과 고군분투를 통해

걷다가 쓰러져 새로운 꿈이 되는 사람

오래된 것들은 다 아름답다


p.15 진실은 현장에 있다

여행이 우리의 삶에 유효한 두 번째는, 어쩔 수 없이 '아웃사이더'의 입장이 되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타자화된 이방인은 싫든 좋든 현실에서 비켜서서 그 현실을 끊임없는 비교와 평가를 통해 저울질하며 스스로를 사유의 세계로 모는 자이다. 자기 스스로를 제도권 밖으로 추방하며 경계 속의 현실을 목도하고 때론 비판하며 성찰하는 자,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이라고 했다. 그 결과로 여행은 우리를 종파주의와 그릇된 편견과 헛된 애국심에서 자유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을 자주하는 사람은 가진 것이 별로 없어도 더없이 풍요롭게 보인다.


그렇게 절반 넘게 책을 읽었을 때, 선암사가 나타났다


p.204 사무치게. 그리운. 부석사, 수도자의. 도시. 선암사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선암사 경내의 모든 건물군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한 공간을 만들며 뚜렷한 성격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게 무엇을 뜻하는 걸일까. 선암사는 일개 사찰이 아니라 수도자들을 거주민으로 가진 도시였다. 그래서 다른 절과는 달리 건물들이 중심 시설인 대웅전의 축을 따르지 않고 죄다 다른 축을 가지고 다른 중심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한 건물군이 없어져도 선암사는 그대로이며 한 부분이 덧대어져도 그 역시 선암사인 것이다. 부분이 전체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도시다.


그간 꽤 많은 절을 다녀왔는데 왜 선암사는 못 가봤지? 송광사는 갔는데 왜 그 옆 선암사는 안 들렀을까. 이곳이 너무도 궁금해졌고, 문화재나 관광지 아닌 '산사' 느낌 물씬한 사진을 보자 마음이 들썩거렸다. 진실은 현장에 있으니, 진짜 그런지 확인하려면 가야겠네 가야겠어. 좀 더 찾아보니, 휴식형 템플스테이 구성도 괜찮고 차 없이 이동하기도 딱이다. 이 정도면 운명이다. 언젠가 선암사를 다녀올 좋은 계절까지, 이 책은 좀 더 소장해야겠다.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 승효상


경향신문, 중앙일보에 기고한 칼럼을 엮은 글이다. 건축과 사회의 관계에 좀 더 집중하는 책이라, 비전문가인 내겐 더 가깝게 느껴지는 책이었다.


p.11 경계 밖으로 스스로를 추방하는 자

(전략) 이들 작업의 바탕은 '불안'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다른 어느 누구도 마지막 결정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이들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 늘 번민하고 주저한 끝에 결국은 자포자기하여 만들어진 게 그들의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자코메티의 조각은 늘 비어 있고, 시시때때로 거리로 나와 그 비워진 부분을 거리의 풍경으로 채운다. 그리고 그 사이에 조성된 팽팽한 긴장이 강력한 힘을 분출시킨다.


국립극단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본 적이 있다. 그때 자코메티를 처음 접했다. 초연 무대 디자인을 맡았고, 이후 이 작품의 모든 무대는 초연의 컨셉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 그 후 한가람에서 자코메티 전시회를 봤을 때, 앞으로 쏟아질 듯 걸어가는 불안한 사람의 모습이 처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이 구절에서 웃음이 나왔다. 결국 자포자기하여 만들어졌다는 작품이, 결국 자포자기하여 걸어나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라 너무도 공감 갔다.



p.29 "당신은 히로시마"

건축은 기본적으로 우리 삶을 영위하는 내부 공간을 형성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이며 따라서 그 공간이 보다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우리가 어떤 건축에서 감동을 느낀다면 그것은 거의 다 그 건축 속에 빛이 내려앉아 빚어진 공간의 특별함 때문이다. 그렇지만 공간은 보이지 않는 까닭에, 남에게 그 감동적 건축을 설명할 때면 대개 천장의 모양이나 벽과 바닥의 장식 등을 이야기할 뿐이어서, 이를 듣는 순간 공간은 사라지고 건축은 잘못 설명되고 만다. 그래서 건축은 어렵다고도 한다.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애매모호하게(혹은 멋모르게) 느끼고 생각했던 것들이 적확하게 정리되곤 한다. 이 구절이 그랬다. 생각해보니, 내가 인상 깊었던 공간을 설명할 때 즐겨 쓰는 표현은 대개 공기가 어땠다거나 빛이 어땠다는 식이다. 건축에는 크게 감흥을 받지 못한 줄 알았는데, 결국 그 건축이 빚어낸 공간을 오롯이 느낀 거였다. 셀프기특!



p.78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그리고 헤테로피아

그 도시들은 하나같이 단일 중심의 구조로, 둘레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밖으로 해자를 깊게 파서 철저히 외부를 차단한 배타적 모습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견고한 성벽은 허물어졌지만, 단일 중심의 도시 구조는 지금도 남아 독존의 세계를 꿈꾼 것을 증거하고 있다. (중략)


고층의 집합주택은 로마 시대에도 있었을 정도로 아파트의 역사는 오래고, 이제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 공통의 주거 형식이다. 그러나 우리 땅에 세워진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형식을 띄는데 바로 '단지'라는 개념 때문이다. 이 땅의 아파트는 그 세대수가 얼마이든지 들어서기만 하면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주변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단지가 된다. 이 단지 속에는 그네들만을 위한 길(아파트 단지 내의 도로는 일반 도로가 아니니 도로교통법을 적용받지도 않는다)을 비롯해 놀이터와 공원과 상가, 유치원과 학교, 마을회관과 행정조직까지 두어 자치적 공동체를 염원한다.


르네상스 도시와 아파트를 비교했는데, 제법 그럴싸하다. 주택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더욱 예민하고 낯설게 느낄 수 있다. 잘 조경된 대단지 아파트를 걸을 때, 오히려 무서움을 느낀 적이 있다. 가끔은 섬처럼 느낄 때도 있다. 단절돼 있고 폐쇄적인 공간이 주는 공포였나 보다. 이번에 집을 보러 다닐 때도, 단지 한 가운데 섬처럼 있는 집은 어딘가 불편했다. 우리의 주거 형식은 앞으로 어떻게 바뀔 수 있을까.



p.90 성찰적 풍경

지혜로운 인디언은 ⌜천 개의 바람⌟ 을 이렇게 노래한다.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있는 게 아니라오, 나는 잠들지 않는다오

나는 숨결처럼 흩날리는 천의 바람이라오

나는 눈 위에 반짝이는 다이아몬드라오

나는 무르익은 곡식 비추는 햇빛이라오

나는 부드러운 가을비라오

당신이 아침의 고요 속에 깨어날 때

나는 하늘을 맴도는 조용한 새처럼 비상한다고

나는 밤하늘에 비치는 온화한 별이라오

내 무덤 앞에 서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 있는 게 아니라오, 나는 죽지 않는다오


그렇다. 묘역에는 죽은 자가 있는 게 아니라 죽은 자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거주할 뿐이다. 그러니 묘역은 죽은 자의 공간이 아니라 남은 우리 산 자가 죽은 자를 기억하며 스스로를 성찰하는 장소며 풍경이다. 그래서 묘역을 찾는 일, 묘지를 가까이 두는 일은 우리 삶의 진정성을 담보하는 일이 된다.


p.105 침묵의 도시

도시가 지속하기 위해서 갖추어야 할 여러 시설이나 장소 가운에 중요한 하나는 신성하고 경건한 침묵의 장소라고 했다.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어쩔 수 없는 도시의 일상이라고 해도 동시에 우리의 영혼을 맑게 빚는 고요함이 없으면 도시는 이내 피로하여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다.

(중략)

독일의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의 명구가 떠올랐다. 그가 쓴 ⌜침묵의 세계 ⌟ 말미에 나오는 글귀다.

"살아 있는 침묵을 가지지 못한 도시는 몰락을 통해서 침묵을 찾는다."

이 황망한 시대를 사는 우리를 향한 경구 아닌가?


승효상 건축가는 여러 책에서 묘지로 대표되는 성찰과 침묵의 공간이 일상에 존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나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공감하고 지지한다. 성찰과 침묵의 공간에서 위로받고 맑아졌던 경험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헬싱키 캄피 광장은 시외 버스터미널과 대형 쇼핑몰로 둘러싸인 곳이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소란스러운 거리 이벤트도 활발한 공간이다. 그 광장 한편에 거대한 방주가 놓여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광장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 펼쳐진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건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속에서 빛이 쏟아져내린다. 괜찮다 괜찮다 하며 묻어왔던 일들이 뒤늦게 이곳에서 위로받았다. 그날 긴 일기를 남겼고, 여전히 난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한번 이곳을 찾고 싶다. 힘내라는 말 대신, 내가 받은 위로의 경험을 전해주고 싶다.


신나서 방주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그 한순간에 압도 당했다. 시끌벅적한 광장에서 작은 문 하나를 넘어오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침묵 그 자체였다. 장식이나 기교 없이, 단순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내부엔 소리 없이 천장의 빛만 쏟아졌다.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 잘게 숨을 나눠 뱉고 또 들이마셨다.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외부와 차단된 좁은 공간, 그리고 그곳을 가득 채운 고요와 빛이 세상 모든 것을 향한 방패가 되어 날 보듬어 주는 것 같았다. 삶이 많이 힘들고 지치는 날이 오면, 그땐 다시 이곳을 찾아야지. 이렇게, 안전하게 숨어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보석 같은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결국은 모두가 가야 할 곳이니, 한 10년쯤 후에는 우리도 일상에서 성찰과 침묵의 공간을 갖게 되지 않을까.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서도, 기대를 버리고 싶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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