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양희수 Feb 28. 2021

백마 탄 남자

후회스럽다. 어차피 이렇게 되어버릴 거라면 완전히 얼굴을 뭉개버릴 것 그랬다. 몇 차례 망치로 내려치니 이성이 돌아왔고 구토가 올라왔고 겁이 났다. 일단 도망쳤다. 여자 친구를 두고 도망쳤다. 핸드폰에 전화가 계속 울렸지만 꼬리가 잡힐까 받질 못했다. 아직 27살인데 이렇게 인생이 망가지다니. 머리를 감싸고 골목에 주저앉았다. 무작정 버스를 타고 도망쳤다. 가장 빠른 목적지. 시시티브이가 없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섬으로 도망칠 테다. 내가 잊혀질 곳에서 몇 년간 살다 나올 예정이다. 핸드폰을 차창 밖으로 던져 버렸다. 빠르게 달리는 도로 위를 몇 번 튕기더니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감옥이라는 곳은 상상하는 것보다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인터넷을 통해 알고 있다. 폐쇄된 장소, 정해진 규칙 속에서 오는 압박. 그 안에 같이 지내는 사람들과 감당하기 힘든 삶의 차이까지 나는 도저히 자신이 없다. 더군다나 몇 년을 보내게 될지도 모르고 감옥을 나온 뒤에 어떠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마땅히 직업도 없이 알바로 한 달 벌어 한 달 버티는 처지인데 세상이 무너져 내렸으면 좋겠다. 김정은 이 새끼는 지금 뭐하나 남한으로 핵 한 방 날리지 않고.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리다가도 갑자기 차분해지기도 했다. 왠지 이대로 섬으로 숨으면 영영 잡히지 않을 것 같다. 오히려 그곳의 삶에 만족하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도있다. 빡빡한 서울보다 그런 틈새에서 가느다랗게 숨 쉬며 살아가는 것도 누군가에겐 삶이 아닌가. 그게 내가 되면 된다. 살기 나름의 문제이다. 괜찮다. 버스에서 내렸다. 콘크리트로 지은 버스터미널 일층 건물에 알록달록한 의자가 놓여있었고 보기 드문 뚱뚱한 티브이가 천장 가까이 걸려있었다. 구석의 슈퍼로 가, 담배를 한 보루 샀다. 언제 다시 피우게 될지 몰랐다. 진통제를 샀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필요할 때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가진 것이라고는 지갑에 든 신분증과 몇 만 원 은행에 있는 돈을 쓰지 못하니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동해 일자리를 구해야겠다. 날이 어두워져 근처 여관에 갔다. 값이 싼 방에 묵었다. 방바닥에 검게 그을린 자국이 있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 보였다. 이불을 꺼내 바닥에 펼쳤다. 뉴스를 틀었다. 내 이야기는 없었다. 어쩌면 나는 혼자 만든 상상에 속아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게 아닐까. 시대가 좋아져 검거율이 높아졌다고 하지만 분명히 잡히지 않거나 애초에 발견되지 않는 범죄도 있을 텐데 내가 그런 부류가 아닐까. 방문을 잠그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 있던 일 때문에 생각이 멈추질 않아 지독한 고독이 밀려왔다. 억울해서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자신이 미웠다. 잠에 들었다. 문 밖에서 들리는 여자 목소리에 눈이 떠졌다. 혹시나 내 이야기가 아닐까 식은땀이 흘러 뒷덜미가 뜨끈해졌다. 계속해서 들어보니 주인아주머니가 손님에게 돈을 받지 못했다는 것 같다. 꿈을 꿨다.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하얀 백마를 타고 나는 어딘가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나의 의지가 아닌 백마의 의지일 수도 있다. 주변은 울창한 숲. 빽빽한 나무에 가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빠르게 달리는 말이 앞으로 나아가면 그만큼만 보였다. 여관을 나오면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사람이 살만한 섬이 있는지 물었다. 의심쩍게 훑어보더니 젊은 청년이 왜 그러냐고 물어왔다. 나는 힘든 일이 있어 잠시 머리를 식히고 싶다고 했다. 근처에 배를 타고 들어가면 적은 가구가 사는 곳이 있다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일 자리를 구하고 싶다고 했다. 뱃 일을 알아보라고 했다. 나는 알겠다고 했다. 내가 뒤돌아 가자 아주머니는 마당에 소금을 뿌렸다. 배 값이 부족했다. 이곳은 경찰에게 잡힐 위험이 있어 불안해졌다. 곧 돈을 갚겠다고 배표를 끊어주는 사람에게 사정을 해볼까 했지만, 괜히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방파제에 걸터앉았다. 절망적이다. 속으로는 불안했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별문제 없이 왔다. 갑자기 벽에 부딪히니 막막했다. 인상 좋은 사람에게 돈을 빌려볼까도 싶었다. 주변을 둘러봤다. 사람이라곤 아까 배표를 끊어주는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파제 끝 작은 배의 갑판을 정리하는 노인이 보였다. 나는 그곳으로 걸어가 담배 한 갑을 드리면서 혹시 저 섬 쪽으로 가시면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노인은 담배를 받은 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봤다. 작은 키에 구부정한 허리, 하지만 절대 약소해 보이지 않았다. 팔에 근육은 갈라져 질긴 나무 심지 같았다. 노인은 일단 타라고 했다. 노인은 운전하며 이런저런 질문을 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며 내가 필요한 일자리나 지낼 곳에 대해 물었다. 노인은 섬에 들어가면 뱃 일 말고는 할 일이 없다고 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작은 창고가 있는데 괜찮으면 그곳에 지내라고 했다. 나는 희망을 느꼈다. 창고의 문은 축축한 스펀지 같았다. 문을 여니 여러 공구들이 보였고 위치를 조금 정리하면 내가 누울 자리는 마련할 수 있었다. 노인은 겨울까지는 지낼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일을 원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단 고정금 없이 물고기를 잡는 만큼 떼어준다고 했다. 노인이 가고 창고 앞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한대 피웠다. 15년이 흘렀다. 섬을 나갈 수 없어 흐른 시간이다. 노인은 어찌 알았는지 나의 범죄 사실을 알았다. 그는 협박했다. 일단을 그의 말을 따랐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그의 편이어서 그를 제압한다고 이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 참고 몇 년이 지나다 보니 이것도 나름의 삶이었다. 어차피 감옥에 잡혀갔다면 이보다 더한 고통을 느꼈을 수도 있다. 차라리 발목 잡혀 이곳에 사는 게 낫다. 그들은 이제 나를 마을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몇 년 전 다른 놈도 잡혀왔었다. 처음에는 심하게 반항하더니 나중에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죄 값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한다. 그 값이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나름의 고통을 받는다. 나는 이 섬에서 그 값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노인이 나에게 서울에 가자고 했다. 나는 왜 그러냐고 묻자 배에 필요한 부품을 구하기 위해서는 서울에 가야 한다고 했다. 너는 서울에서 온 놈이 아니냐고 자기를 안내하라고 했다. 왠지 모를 눈물이 차올랐다. 섬을 나와 마을에 도착했다. 변화가 없다. 아마 내가 당시 오기 전부터도 지금의 모습일 것이다. 어디선가 차를 구해왔는지, 노인이 차를 몰고 내 앞에 섰다. 나는 조수석에 타고 앞을 바라봤다. 너무 오랜만에 타는 차라 멀미가 났다. 나는 차에서 내려 풀 밭에 토를 했다. 노인은 차에서 나와 긴 막대를 물었다. 입에서는 연기가 나오고 냄새는 담배 냄새가 났다. 요상한 담배였다. 

작가의 이전글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