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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희수 Oct 14. 2020

왜 독재자는 살찌는가

원하지 않는 것을 제외한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사회가 왔다. 과거의 모든 인간들이 꿈꿔온 판타. 쉽게 얻으면 쉽게 만족할 것이라는 우려는 맞지 않았다. 모두가 만족했고 모두가 모두를 사랑했다. 매 순간 평화롭고 행복이 충만했다. 일이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게임 같이 즐겼고 경쟁했지만 모두가 우승하는 자와 같은 기쁨을 누렸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치밀한 교육으로 몸과 정신에 세우고 어른들은 천천히 늙어가면서 자신의 역할에 맞게 사회에 헌신하는 동시에 자신의 삶을 만족했다. 동물들은 더 이상 희생당하지 않는다. 세포 복제로 모든 음식들이 재배되고 있다. 살아있는 식물을 섭취하는 것에 관해 몇 백 년 전 반대 운동이 있었으나 그것 또한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신 재생 식물을 만들었다. 물론 과학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지 못했었다. 인간은 음식을 섭취함과 동시에 오감으로 만족시켜줘야 한다. 그것이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이 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다. 인간의 몸이 발달하면 더욱 많고 고질량의 음식을 원한다. 이와 같이 정신 또한 발달하면서 더욱 견고하고 논리적이고 신선한 정보를 원했다. 기존에 미디어에서 주는 웃음거리는 더 이상 소비하지 않게 됐고 본질 없이 껍데기만 말하는 구시대의 종교 또한 사람들이 외면하니 자동적으로 소멸했다. 심한 사회 폭동이 일어났고 이 폭동은 일반적인 집단의 형태가 아닌 개인적인 범죄와 일탈 사회구조 파괴로 자행됐다. 이런 작은 사건들이 모여 국가의 위기까지 발달하게 됐고 세계 3차 대전이 일어나 인류의 멸망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하나의 구원자가 나타났으며 그는 오직 단일의 존재로 스스로 자신을 따르게 만드는 힘을 가졌다. 그 힘은 마법과는 전혀 거리가만 이성적인 판단으로도 수긍이 되는 힘이었다. 모두가 만족하는 답을 내놨고 그것은 그의 입을 통해서 말로 정해졌다. 인류의 단 한 명에게도 불합리한 답을 내놓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따르고 그의 말을 사회 곳곳에서 받아들여 정치, 사회, 경제, 예술, 종교, 철학, 수학 등 완전한 다음 단계에 올라갈 수 있게 됐다. 그 후로 영원한 평화는 지속되었으며 그가 죽고 난 뒤에도 그의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공부하고 수행을 하며 자신을 사회에 바쳐 살아가는 횃불이 되어 다음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그 불꽃을 꺼트리지 않고 이어갔다. 사회의 계급은 여전히 존재하였으나 그것은 만족에 따른 차등이었다. 누군가는 마당이 있는 집에 가족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을 만족하는 자가 있었으며 또 누군가는 기업을 이끌며 세계를 누비는 삶을 만족하는 자가 있었다. 또 누군가는 가진 것 없이 평생을 여행을 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경험들을 충만하게 하고 싶은 자가 있었고 뚜 누군가는 자신이 손 뻗는 모든 곳에 자신의 모든 것이 있기에 그러한 편리함에 만족하며 사는 자가 있었다. 이러한 만족의 차이로 자연스럽게 계급이 달라졌으나 이것은 계급이라고 표현하기보다 역할의 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모두가 사회적 톱니로써 완벽하게 맞물려 영향을 주고 그 영향으로 그들의 근본적인 만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간혹 사회의 모순이 발견되기도 했다. 그것은 의심하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용기 있는 자들 그리고 해봐야 아는 자들이다. 그들을 위한 해결 방법으로 현실을 완전히 구현한 가상의 세계를 온전히 그들을 위해 주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약간 소비하고 가상의 세계에서는 한평생을 살아본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일들의 대해 끝까지 가본 후 현실의 세계에서 어떠한 삶을 살 것인지 판단을 내리게 했다. 인간의 근본은 모두가 같다.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그들은 한평생을 자신의 의심과 도전, 용기로 살아보고는 타인이 결여된 삶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결국 사회의 톱니 속에 맞게 살아갔다. 발전된 사회만큼 강력한 모순이 일어나려 했으나 그 또한 강력한 방법으로 억압보다는 지혜를 사용해 사람들의 맞게 해결해 나갔다. 꽃을 꽃으로 보지 않고 아름답다고 봤기에 우리의 비극은 이어져왔다. 인간의 위대함은 역사에 있지 않고 미래에 있다는 사살을 아는 지금이 행복이라는 단어가 정의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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