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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Sep 05. 2024

님아, 그 과욕을 멈추어 주오

처서가 지나니 제법 바람이 선선해졌다. 계절이 바뀌었음을 느끼며 9월에 들어서기 직전, 무언가 계획을 세워 얼마 남지 않은 하반기를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9월 1일부터 연말까지 "원서 100권 읽기"라는 (나 혼자 하는) 챌린지를 만들었다. 커리어의 연장선에서, 그리고 엄마표 영어 로드맵을 구체적으로 짜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기간: 9/1~12/31 (약 120일, 17주)
- 목표: 원서 100권 완독

고로 한 주에 적어도 6권은 읽어야 함!!



What to read?


평균적으로 계산해 보니 일주일에 6권씩 원서를 읽어야 했다. 월요일부터 하루에 한 권을 완독 할 수 있다면 일요일은 재정비의 날이 되는 것이다. 나는 원서 읽기 입문자로서 어려운 책으로 도전하면 필시 챌린지가 실패로 끝날 것만 같아서 비교적 쉬운 아동/청소년 문학 작품부터 섭렵하기로 결정했다. BL(Book Level) 지수 4~5점대의 쉬운 책들을 앞에 배치하여 속도를 쭉쭉 뽑은 다음에 차츰 성인 소설이나 고전을 읽는 걸로! 이렇게 방향을 정하고 엄마표 영어 책들을 보며 추천서를 엑셀 파일로 정리했다. 그렇게 추리니 130권이 넘었고, 이제 그 리스트에서 책만 쏙쏙 고르면 되어서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무얼 읽을지 정했으니 이제는 책을 준비해 볼까?! 닥치는 대로 집어서 읽어야 할 것 같아 미리 1주일치 원서를 구비해둬야 했다. 이때 미리 리스트업 해두었던 엑셀파일이 아주 도움이 됐다.



Where to find?


- 먼지 쌓인 내 책장 (친정집)
- 온/오프 서점
- 오프라인 중고 서점
- 당근 마켓
- 인근 영어 도서관


책을 마련하기 위해 집에 쌓여 있는 원서를 뒤졌고, 그 속에 없으면 중고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지 검색을 했다. 소장용이라기보다는 페이페북에 이것저것 메모하며 읽고 싶었기 때문에 중고책도 상관없었다. 그리고 영어책 한 권을 생각보다 완독 하는 사람이 몇 없기 때문에 중고 서점에 가면 예상외로 좋은 컨디션의 책을 구할 수 있다는 사실! 나만의 꿀팁이다. 그만큼 원서 읽기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뜻이기도 하다. 마찬가지 원리로 당근에서도 거의 새 상품급 책들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9월 2일 월요일 스타트! 이제 읽기만 하면 된다. 내가 처음으로 골라 잡은 책은 스펜서 존슨의 <The Present>였다. 제목처럼 현재를 선물처럼 살고 싶어서 끌렸던 것 같다. 이 챌린지를 하는 이유도 지금 이 시간을 보다 가치 있게 사용하고 싶어서랄까? 아주 나에게 시의적절한 책이었다. BL 지수 5.0으로 난이도도 쉬운 편이었고, 무엇보다도 책이 얇았다는 점이 이 책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얇고 쉬운 책이어도 책장이 쉽사리 넘어가지 않더라. 나의 실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구나를 또 한 번 느꼈다. 그래도 무조건 오늘 안에 이 책을 끝내야 했기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길거리에서도 휴대폰 대신 책을 펼쳤다. (큰 책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니 꽤 많은 양을 읽을 수 있었고 마치 내가 수험생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이가 하원하고 또 지지고 볶고 하다 보니... 결코 하루 만에 완독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너무 무리한 계획을 세웠나 싶을 때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는 의지가 불타올랐다. 그렇게 다음 날도 이 책과 사투를 벌였다.





그날 저녁. 식사를 준비하면서 마음이 바빠졌다. 책 읽는 것도 끝내야 하고, 간략하게라도 리뷰를 정리해서 SNS에 기록을 남겨야 했기에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일단 저녁 차리는 것부터 끝내고 하나씩 해결하자고 마음먹은 찰나였다. 갑자기 부엌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에어컨 때문에 창문을 다 닫아 놓아서 밖에서 냄새가 들어올 리는 없었다. 아무리 킁킁거려도 원인을 알 수 없었는데... 혹시나 해서 인덕션 위 냄비를 보았더니, 빈 냄비가 인덕션 위에서 타고 있었다. 내가 내용물을 넣지 않고 인덕션을 작동시킨 것이다. 황급히 탄 냄비를 물로 식히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러다 골로 가겠구나.



영어책 100권 읽자고 살림 손에서 놓고, 아이 안 챙기고, 정신 놓고 있다가는 뭔가 큰일이 발생할 것만 같았다. 경주마 같았던 나에게 냄비가 경고등을 켜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바로 100이라는 숫자를 포기했다. 그리고 과욕이 불러온 예비적 대참사를 인정해야만 했다. 사람이 칼을 뽑아 들었으면 무라도 썰어야 되는데 그러지 못해서 참담할 뿐이었다.



음란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거짓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살인도 이 여자에게는 죄가 아니었다.
오로지 소망을 들어달라는 다짐만이 간절했을 뿐이다.

박경리의 <토지 2> 중에서



마침 오늘 읽은 <토지 2> 12장의 한 내용이다. '귀녀'가 원한을 품고 최 씨 가문을 몰락시킬 계략을 세우고 하나씩 실천에 옮기는 장면이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사람이 간절하면 못해낼 것이 없구나'를 느꼈다. 그리고 계획을 실천으로 옮기는 녀의 실행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귀녀는 비도덕적이고 위법한 행동을 저질렀다. 따라서 그녀가 선망의 대상이라는 의미가 결코 아님을 명확히 밝힌다. 범죄 행위를 옹호할 생각 조금도 없다. 그리 결국 그녀도 과욕 때문에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과연 나에게는 그런 의지와 실행력이 있을까? 하나의 뜻을 끝까지 관철하려는 힘, 그것이 부족함을 느끼며 다시 한번 나를 객관적으로 보게 다. 그리고 현실적인 타협안으로 일주일에 원서를 최소 2권 정도는 읽어보자고 계획을 수정했다. 숫자에 집착하기 싫지만, 어렴풋하게라도 권수를 정해 놓아야 나와의 약속이 지켜질 것 같기 때문이다. 일단 연말까지 쭉 계획을 실행해 보는 걸로!


과욕이었음을 인정하며 이렇게 나의 챌린지는 삼일천하로 끝이 났다. 그렇지만 원서 읽기는 계속된다. To be continued.

 


Special thanks to


천 권 읽기 영감을 주신 함성 정예슬 작가님,

작년 연말 50권을 읽으시며 성공적인 사례를 남겨주신 '일상을 노래하다' 정석진 작가님,

그나마 매일 원서를 읽을 수 있게 스터디를 이끌어주시는 NTB 김남주 리더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더불어 좋은 글벗, 책벗님들이 계셔서 미약하게나마 매일 읽고 쓰고 있습니다. 함께 해서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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