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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Jan 05. 2017

길을 돌아보며

책가방 -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

학교가 희망이기를 바란다.

황무지에서 새싹들이 돋아나듯이.  비옥한  땅이 될 수 있는 가능성, 무엇보다도 미래의 희망인 어린 아이들이 새싹처럼 돋아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학교가 지닐 수 있게 되기를 염원한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라.

          어렸을 때도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다.

          앞날 늙어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난 죽으리라.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원컨대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순진한 경건으로 이어 가기를


오래전 기억에 묻혀 있던「워즈워드의 무지개」라는 시 구절이다. 특히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는 구절. 아버지란 말엔 거울이란 의미가 있다. 숨김 없이, 거짓 없이 그대로 투영해버리는 거울. 때문에 아이 앞에 서 있는 어른의 모습에 따라 그 거울은 맑고 깨끗한 명경지수가 될 수도 있고, 삐뚤어진 거울이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의 거울이 되는 일. 우리 어른들은 잘 하고 있을까?



가브리엘 루아는 8년간의 교사생활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신참내기 교사시절에 만나 영원으로 기억되는 아이들의 모습을 추억으로 그려냈다. 스물의 선생님이 반백이 되었듯이 그 아이들은 빠른 속도로 성장해 어른의 모습으로 변했으련만 선생님의 기억에는 영원히 첫 만남 때의 모습으로 간직된다. 

 가난한 초원의 한 분교에서 만난 아이들. ‘성탄절의 아이’ 클레르, ‘종달새’ 닐, 문제가정의 드미트리오프, ‘집 보는 아이’ 앙드레, ‘찬 물 속의 송어’ 메데릭.  선생님은 광활한 초원마을에서 이 아이들과 함께 문자를 익히고, 노래를 배우고, 타자의 존재와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가난에 찌들어 생활고 해결이 급한 아이들이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대학에서 배운 이론과 현장에서의 교육은 차이가 크다. 이론대로라면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그 누구보다 세상에 대해 관대하고 사랑을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학교라는 현장에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 책의 주인공인 젊은 여교사가 처한 ‘학교’라는 공간도 마찬가지이다.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하는 클레르나 낡은 판자조각과 폐품으로 만든 오막살이집에서 살고 있는 닐, 강물 속에 말뚝을 박아 그 위에 판자로 얼기설기 이어놓은 바라크에 살고 있는 드미트리오프와 집안일을 도맡아 하느라 학교를 그만두어야 하는 앙드레. 그 아이들의 고단한 삶에 과연 ‘사랑’이 끼어들만한 여유가 있는 것인지. 회의가 들 수 밖에 없다. 

 

불행히도 그 아이들의 삶은 우리의 예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에도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등록금을 내지 못해 학교에 나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점심값이 없어 물배를 채우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 아이들에게 ‘학교’란 곳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아이들은 일곱 빛깔, 무지개와 같은 색깔의 무한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곳이 ‘학교’여야 한다. 공교육의 문제점이니, 사교육비가 어쩌니 하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들리지 않았으면 한다. 


 “나는 책상에 가 앉아서 우리 학생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느라 마음이 급했다. 나는 한 줄기 작은 오르막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거기에, 아이들이 하늘 저 밑으로 가벼운 꽃장식 띠 같은 모양을 그리며 하나씩 하나씩, 혹은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었다. 매번 나는 그런 광경을 바라보면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나는 광대하고 텅 빈 들판에 그 조그만 실루엣들이 점처럼 찍혀지는 것을 볼 때면 이 세상에서 어린 시절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고 약한 것인가를.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우리의 어긋나버린 희망과 영원한 새 시작의 짐을 지워놓는 곳은 바로 저 연약한 어깨 위라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감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삶에 대해 잠시 돌아본다. ‘어른’이라는 존재를 무슨 특권인 양 휘두르며 어린 아이들에게 억지와 강요를 부리지는 않는지. 말로만 희망과 미래의 주인공으로 어린 그들을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이들과 어른 교감하는 계기는 언어나 경제적 수준이 아니라 사랑이 담긴 포옹과 애정이 서린 미소다. 오늘 하루 내 아이들에게 몇 번이나 웃어주고, 몇 번이나 포옹을 해 주었는지 떠올리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풍부한 용돈이나 값비싼 장난감 따위가 아닐지 모른다. 어른들 스스로가 그런 것들로 아이들을 제압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아이들은 무엇을 가장 좋아할까? 

우리는 어린 시절, 먹을 것이 늘 부족해 허기지고 헤진 옷을 기워 입고 다녀도 환하게 웃고 행복하단 말을 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곰곰 생각해보자. 그 생각 끝에 아이들을 향해 미소와 함께 따뜻한 말 한마디를 먼저 건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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