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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Jan 19. 2017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쏘는 소설

책가방- 도선우 <스파링>


여덟 살 무렵, 처음으로 집에 텔레비전이 들어왔다. 저녁마다 친구 몇이 텔레비전을 보러 왔다. 평소 아이들의 방문을 좋아하지 않던 부모님도 그때만은 관대했다. 우리가 보는 것은 네모난 화면을 꽉 채운 사각의 링이었다. 심판의 눈을 속여 반칙을 저지르는 비겁한 상대를 박치기로 쓰러뜨리는 김 일과 맨 주먹으로 자신보다 갑절은 큰 외국선수를 KO시키는 복서들. 우리는 장내 아나운서보다 더 격앙된 음성으로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며 그들의 박치기와 주먹질을 흉내 냈다. 아마 그 때 우리의 세계는 사각의 반듯한 링과 그곳을 맨 주먹으로 제패한 그들이었을 거다. 자라면서 인생 자체가 거대한 사각 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늘 읽은 도선우가 쓴 <스파링>의 주인공 장태주의 인생 또한 그랬다. 


장태주는 세상에서 가장 불길한 기운을 타고 났다. 십대 소녀의 원조교제로 만들어진 그는 화장실에서 태어나 보육원을 전전했다. 어느 누구도 옆에 있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불러주거나 찾아오는 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인생, 새로운 환경에 처할 때마다 무기력한 노예라도 된 양, 당연한 현실이 우리에게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지할 때까지 묵묵히, 동공의 빛을 끄고 몸을 늘어뜨린 채 자신의 색을 자기도 모르게 지우는 것 또한 우리의 습관이었다. 우리는 익숙한 곳이 아니면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28쪽)     


주눅이 잔뜩 들어 늘 고개 숙이고 사람들의 시선에서 비껴 살아가는 어린 고아. 그는 링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각지대에서 눈빛을 죽이고 투명인간처럼 살았다. 아마 그 일이 없었다면 평생을 그렇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장태주가 처음으로 돌보고 사랑을 준 호금조 ‘알리’가 동급생에 의해 불에 태워졌다. 처음으로 사랑한 존재를 지키지 못한 절망이 장태주의 숨어 있던 본능을 일깨웠다. 


상대의 동선을 읽는 천재적인 동체시력과 한방에 쓰러뜨리는 핵주먹. 상대의 공격을 예측할 수 있고, 한 방에 상대를 쓰러뜨리는 능력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버렸다.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는 삶에서 무언가를 찾는 삶으로 전환한 것이다. 그는 비로소 사각지대에서 사각의 링 안으로 발을 내딛게 되었다.


장태주는 타고난 주먹과 운동 신경으로 국내는 물론 세계 챔피언의 자리에 등극한다. 물론 그 과정이 평탄하거나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장태주는 언제나 불행이 따라 붙는 홀몸이었고, 뭔가에 도전하려 할 때마다 주변을 에워싼 조직의 방해가 끊이지 않았다.      


때릴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암묵적인 합의하에 정해진 서열 가운데 몇몇이 휘두르는 폭력은 규율 준수 차원에서의 징계, 거기 해당하지 않는 사람이 일으키는 소동은 모두 폭력이었다. 어느 곳을 가도 세계는 같은 원리로 돌아갔다. 웃기지도 않았지만 본래 웃기지도 않은 게 이 세계가 돌아가는 원리였다. 우주에서 가장 불길한 기운을 타고난 천하의 쌍놈이었기 때문이다.” (170쪽)     


어딜 가나 마주치고 모든 곳곳에 존재하는 폭력의 원리는 장태주를 괴물로 만들었다. 상대 선수의 급소를 가격하고, 기자를 폭행하는 사회적 괴물로 변모하는 그를 보자, 예전에 봤던 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타이슨의 재기전이었다. 챔프의 화려한 복귀를 염원하는 관중들의 시선이 링에 집중됐을 때, 타이슨이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다. 비명을 지르며 귀를 감싸진 홀리필드가 붉은 피를 뚝뚝 흘리던 장면과 그걸 바라보며 씨익 웃던 타이슨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타이슨은 왜 홀리필드의 귀를 물어뜯었을까? 그 정확한 이유는 아무도 모른다. 결국 타이슨은 괴물이란 지탄을 받으며 사각의 링에서 쫓겨나고 파산에 이른다.


타이슨과 같은 전철을 밟는 장태주는 과연 어떻게 될까? 결말까지 읽고 나자 더욱 궁금해졌다. 모든 것을 내려놓은 타이슨처럼 그도 가족을 모두 잃고 희대의 괴물로 불리며 사각의 링을 떠난다. 그러면서 그는 호기 좋게 외친다. 이제는 사랑을 찾아가겠노라고. 


과연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운을 타고 난 그가 과연 첫사랑을 만나고 이룰 수 있을까? 결말까지 단숨에 읽은 뒤 나는 도선우 소설가가 참 무서운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이런 거대한 소설을 아무렇지 않게 세상에 훅훅 날릴 수 있다니 말이다. 늦깎이 신인인 그의 차기작이 기대된다. 과연 도선우와 장태주가 보여줄 다음 작품이 어떤 내용이고 어떤 모습일지 벌써부터 설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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