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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혜영 Feb 27. 2017

물푸레나무 같은 여자

-신문의 창 (밀물썰물,2008)


지인의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친한 문인끼리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한 자리였다. 축하주가 몇 차례 돌고, 흥이 오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시를 읊기 시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시낭송이었다.   

   

눈을 감고 낭송되는 시를 음미했다. 누군가의 입에서 오규원 시인의 ‘한잎의 여자’가 흘러 나왔다. ‘나는 한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로 시작하는 시를 들으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한때 물푸레나무 같은 여인이고 싶던 적이 있었다. 대학시절 술만 마시면 ‘한잎의 여자’를 낭송하던 동기를 흠모했었다. 물푸레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지 못하면서 그저 동기의 입에서 나오는 시가 좋아서, 그가 좋아서 한 그루의 물푸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동기의 마음이 내가 아니라 다른 선배를 향한 걸 알고 난 뒤엔 그 시가 미워졌다. 그가 술자리에서 오규원의 시를 읊을 때마다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를 읊으며 핏대를 세웠다.   

  

결국 선배는 다른 남자에게 가고, 그와 나도 군대를 계기로 멀어졌다. 그 후론 그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다. 이젠 그의 얼굴이 희미하고, 이름마저 가물한데 여전히 오규원의 이름을 들으면 ‘한 잎의 여자’를 낭송하던 그가 생각난다. 아마 그의 시가 내 가슴에 들어와 박혔나 보다.     


요즘같이 걸러지지 않은 대화와 장난스런 수다가 넘치는 세상에서 평생 기억되는 시 한 수는 그래서 위대할 수 밖에 없다.      


한 잎의 여자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듯 보일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같은 여자

바보같은 여자

시집같은 여자

그러나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나 혼자만 사랑하는 여자, 물푸레 나무 그림자처럼 슬픈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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